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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터러시 멘토 Sep 27. 2022

책의 역사 = 나의 역사

어린이책 읽는 어른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책의 역사’가 있습니다. 70년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저는 요즘 아이들과 달리 아동문학을 제대로 접하지 못했습니다. 어디선가 세계 아동 문학을 접해 본 것도 같지만, 첫 독서로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니 대충 책 구경만 했던 것 같습니다. 저에겐 잠시 함께 살게 된 막내고모의 혼수품이었던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이 제대로 된 첫 번째의 독서였습니다. 어린이책 출판 시장이 본격화된 된 것이 90년대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어린이책 출판이 90년대 말에 이르면 출판시장을 이끌게 됩니다. 그림책들이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하고, 평범한 집에서 어린이책을 하나둘씩 본격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80년대 생들이 어린이책으로 독서를 시작한 첫 세대입니다.


80년대, 90년대 생들과 ‘책의 역사’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그 세대들의 독서 환경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90년대와 2000년대 많은 가정에서는 활발히 출판된 세계 문학 전집, 그림책 등을 손수 구매해서 자녀들에게 책을 읽도록 도왔습니다. 그 중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어린이 책방도 다니고, 도서관 나들이도 하면서 독서를 도운 부모들도 있었습니다. 또 학교 도서관에서도 어린이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텔레비전 세대였던 이 세대들은 2000년대 이후 세대보다 어린이책의 영향력을 더 많이 받았지 않았나 싶습니다. 


21세기를 훌쩍 넘어 태어난 요즘 아이들은 뉴미디어 세대이면서 어린이책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의 일상화로 문해력이 이전 세대보다 급격하게 떨어진 아이들에게 ‘책 읽기’는 또 하나의 부담되는 숙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4차 혁명 시대에 ‘독서’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면서 요즘 아이들에겐 책 읽으라는 말이 부모님의 대표 잔소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독서가 즐거움이 되기도 전에 짐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흥미진진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뒤로 하고 반응이 느린 책으로 돌아서기가 힘이 듭니다. 아이들은 읽어야 할 수많은 책 앞에서 무감각해지고, 무뎌지고, 무관심해졌습니다. 


어느 시대보다 ‘독서’가 강조되지만, 또 어느 시대보다 ‘독서’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시대 ‘책’을 대하는 아이들의 점점 더 차가워지는 마음, 점점 더 멀어지는 태도를 아이들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아이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찾아주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만의 ‘책의 역사’를 계속해서 써내려가게 해 주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첫 사랑, 첫 눈, 처음 학교, 첫 여행, 처음은 누구나 애틋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첫 게임, 첫 아이돌 등으로 처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아이들은 잊어버릴 지도 모를 첫 동화책(들)을 평생 그 아이 곁에 두어 “책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 독서교육의 첫 번째 장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몰입해서 읽었던 책들이 근처에 놓여 있다면 그 몰입의 시간, 그 이야기의 재미, 그 행복한 시간을 떠올리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 한 권, 한 권의 가치를 어른이 먼저 제대로 인정해 준다면 아이들은 자신을 한 걸음 키워준 책의 고마움을 알고, 또 한 걸음 나가게 해 줄지도 모를 낯선 책에 마음과 시간을 줄 지도 모릅니다. 


책에 조금 시큰둥해지기 시작한 둘째와 시간을 내어 거실 책장 한 귀퉁이를 비워, 자신만의 책장으로 꾸며봅니다. “이 책 중에 네가 간직하고 싶은 책만 골라봐. 엄마가 절대 남한테 안 빌려주고, 버리지도 않을게.” 아이는 신나게 재미있었던 책을 고릅니다. 그 중에는 보고 또 본 책도, 한 번 읽고 감동을 받은 책도 있습니다. 만화책 시리즈도 빼놓지 않습니다. 모아보고 나니 책이 참 고맙습니다. 책의 저자들에게도 참 감사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저도 본격적인 어린이책 독자가 되어, 그림책부터 청소년책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독자로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였습니다. “어린이책을 읽는 어른”으로 거듭났습니다. 머리 아픈 어른책들은 책장에 모셔두고 제목만 구경하고, 술술 잘 읽히는 어린이책을 아이들과 함께 읽었습니다. 


어린이책 읽는 어른이 되면 좋은 점이 많습니다. 먼저, 아이의 내면적인 성장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아이의 내면은 눈에 보이는 키처럼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지만, 어른들은 그 성장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린이책을 통해 어린이다움이 무엇이고, 어린이가 세상을 어떻게 익혀가는 지 작가와 함께 들여다보면 아이의 현재진행형인 성장에 한 발을 들여다 놓을 수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생각과 고민들을 좀 더 세심하게 현재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아이의 삶에 놓여 있는 수많은 문제들에 진짜 귀를 열어줄 마음이 생깁니다. 마냥 단순해 보였던 친구 문제, 이성 문제, 외모에 대한 관심, 성적에 대한 걱정 등이 좀 더 복잡하게 얽힌 문제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이해하다보니 아이와의 대화가 좀 더 풍성해집니다. 


어린이책은 어른들의 삶을 따뜻하고 풍요롭게 만듭니다. 좋은 어린이책에 표현되어 있는 아이-작가-나의 공간을 통해 ‘동심’으로 인한 치유가 어른인 내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어른으로서 시간이 갈수록 잃어버리는 어린이에 대한 존중, 나아가 타인, 인간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도록 붙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존중의 마음은 고스란히 내가 사랑하는 아이에게로 돌아갑니다. 


어린이책을 읽는 어른이 되면 시장으로 내몰린 아이들의 교육을 교육다운 교육의 자리로 보내는 안목이 생깁니다. 자본의 물량 공세로부터, 사회의 속도 전쟁으로부터, 아이들을 공부하는 기계로 여기는 분위기로부터 내 아이를 지켜낼 힘과 지혜와 뚝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책 읽기가 외로운 싸움이 아님도 알게 됩니다. 독서는 좋은 책의 ‘작가’, ‘저자’와 함께 하는 여행입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유명한 아프리카 속담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교육이 가정 안으로 밀려 들어와 각각의 가정에서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정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을 넘어 세계와 미래와 소통해야 할 시대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주장을 하고 싶어집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세계의 ‘작가’, ‘저자’와 함께 해야 합니다.” 


천천히, 그러나 수준 높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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