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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터러시 멘토 Oct 21. 2022

카타르시스 : ‘나’를 일구어가다

느끼는 이야기_ 동화와 소설의 맛

“동생이냐?”

청년이 물었다.

“예.”

“엄마는 밖에 나갔니?”

“죽었어요.”

몽실은 눈물이 왈칵 솟았다. 그러나 꾹 참았다. 북촌댁과 울지 않기로 약속했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그럼 넌 이 아기랑 혼자 사니?”

“예, 아니어요. 댓골 가면 우리 엄마가 있어요.”

“방금 엄마는 죽었다고 했잖니?”

“……”

몽실은 대답을 못했다.

“너, 이름이 뭐냐?”

청년이 물었다.

“몽실이여요.”

“몽실이! 이쁜 이름이구나.”

“얜 난남이여요.”

“난남이?”

청년은 빙그레 웃었다.

“나, 시간 있으면 이담에 올게. 지금은 가 봐야 한단다.”

청년은 몽실의 가슴에 안긴 난남이의 조그만 손을 꼭 쥐었다가는 놓고 황급히 달려나갔다. 몽실은 왠지 갑자기 외로움이 가슴 안으로 몰려왔다. 인민군 청년이 잠깐 동안 남기고 간 사람의 정이 몽실을 외롭게 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느꼈을 때만이 외로움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친구이든 부모님이든 형제이든 낯모르는 사람이든, 사람끼리만이 통하는 따뜻한 정을 받았을 땐 더 큰 외로움을 갖게 되는 것이다.


권정생, <몽실 언니>


"이 책은 감동스럽다는 말로 그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는 많은 일들이 나왔다.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을 때까지 난 <몽실 언니>에 나오는 북촌댁, 밀양댁, 정씨, 김씨, 몽실이, 난남이, 영득이, 영순이 모두가 다 불쌍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6.25 전쟁하면 그냥 남북전쟁이라고만 쉽게 생각했었다. 이 책을 읽고 그 전쟁이 얼마나 나쁘고 힘든 전쟁이었는지 깨달았다. 특히 고생한 몽실 언니한테 고생했다고, 수고했다고 말해 주고 싶다. 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 지 정말로 느꼈다. 친구들도 이 책을 읽고 그걸 느꼈으면 좋겠다. 지금 힘든 코로나 시대보다도 6.25가 훨씬 끔찍한 전쟁이었고, 우리는 밥을 안 굶고 먹는 것조차 감사해야 해야 된다고 말이다. 이 책에 별 다섯 개보다 더 많은 만 개를 주고 싶다."


한쪽 편에 판타지가 주는 카타르시스가 있다면 다른 편에는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있습니다. <몽실 언니>를 읽는 이 시대의 독자들은 몽실이가 겪는, 상상을 초월한 현실의 비극과 그 가운데 몽실이가 지탱하고 있는 선함과 의지를 목도하며 다른 의미의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비극적 운명을 헤치고 나오는 인물을 통해 얻는 감동입니다.


선안나 작가는 <천의 얼굴을 가진 아동문학>에서 사회 참여적 장르인 소설과 현실 법칙 이상의 우주적 질서를 반영하는 우주 참여적 장르인 동화를 구분합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어린이들에게 읽히는 권정생 작가의 <몽실 언니>는 소설인 동시에 동화라고 말합니다. 한반도의 가장 참혹했던 시기인 전쟁과 분단 무렵을 배경으로 장애를 가진 작은 소녀가 온몸으로 삶을 헤쳐 나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주인공 몽실의 순연함과 변함없이 흘러넘치는 사랑의 에너지와 삶에 굴하지 않는 끈질긴 의지가 이 소설을 동화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인간다운 어떤 고결함과 삶의 깊은 진정성이 작품에 구현되어 있어서 우주적인 빛을 발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몽실 언니>의 가치가 그래서 조금 남다른 것 같습니다. 사실적인 서술 가운데 주인공의 우주적인 빛은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감동은 자신을 바라보게 합니다. 사실적인  전쟁과 분단의 역사를 담은 책은 정보를 주지만 ‘나’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또 리얼리즘 소설로 담는 비극은 자아와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감당하기는 너무 벅찹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줄곧 그림책은 물론이고, 수많은 동화를 듣거나 읽으면서 “만약에 나라면”이라는 고도의 정신활동을 수행합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나이 정도가 되면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 목표, 의도 뿐 아니라 신념도 이해하는 수준이 되고, 스토리 안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사건의 진짜 의미를 잡아낼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어린이문학의 카타르시스는 그들이 꿈꾸는 반항아들 즉, <안돼 데이빗>의 데이빗이나 <찰리와 롤라>의 롤라, <삐삐 롱스타킹>의 삐삐를 통한 대리만족도 있고, 김영진 그림책이나 <수상한 시리즈>, <불량한 자전거 여행> 등 다양한 생활 동화의 주인공들과의 공감, 또 <몽실 언니>와 같은 비극에서의 ‘카타르시스’까지 다양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어린이문학은 주인공이 겪는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공감을 얻고, 사건의 완전한 해결을 이루는 해피 엔딩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문학적 공감은 잘못이 전혀 없거나 아니면 거의 없는 인물들을 향해 일어나기가 가장 쉽습니다. 아마 우리 자신이 잘못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라 여기는 태도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 문학적 공감은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른 캐릭터에게로도 확대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 독자들도 주인공의 바보 같음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조금 더 높은 위치에서 주인공을 내려다보며 메타인지력을 높입니다. 또한 문학적 공감은 신에게 도전하거나 비극적인 죄를 범함으로써 우리의 정의 회로를 침해한 캐릭터에게로도 나아갑니다. 그의 잘못이 나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라고 공감하기 시작하면 독자는 주인공이 겪는 마음 고생, 몸 고생을 자청해서 함께 겪어 냅니다. 


여기서 이야기 즉 픽션의 의미를 짚어볼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그토록 이야기에 집착하는가?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는가? <몽실 언니>와 같은 훌륭한 문학은 주인공이 닥친 현실 뿐 아니라 그가 어떤 의지와 신념,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고, 독자는 자신의 현실 즉 ‘지금, 여기’를 뛰어넘어 자유롭게 상상하고 성찰하며, 방대하고 풍부한 ‘가상의 현실’, ‘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사물, 사회, 역사를 고찰합니다. 아이들의 독후감에는 주인공에 대한 감동, 역사에 대한 인식, 자신의 행복한 현실에 대한 감사로 평범하고 단순히 표현되어 있지만, 작품의 역할은 글로 표현하지 못한 부분을 인지한다면 훨씬 더 방대하고 심오할 것입니다.  


신경과학자이자 문학 박사인 앵거스 프레처는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에서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는가를 밝힙니다. 그는 비극이나 트라우마를 통한 카타르시스가 책을 읽는 내내 마치 신처럼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하는 메타인지력을 높인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타인의 비극적인 순간에 (독자가 되어) 함께 있어줌으로써 (주인공의) 고마워하는 마음을 감지함으로 비극을 읽는 독자의 자기효능감을 높이는 효과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문학적 공감, 혹은 카타르시스가 독자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좀 더 밀고 간다면 의식과 무의식, 가치와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나’를 일구어나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별히 ‘자아존중감, ‘자기효능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대, 타인과의 깊은 교감과 소통을 통한 ‘사회성’ 발달이 어려운 시대, 동시에 그것들이 가장 요구되는 역설적인 시대에 문학, 특별히 ‘동화’의 역할은 간과되어 있는 측면이 큽니다. 어쩌면 ‘동화’가 우리에게 하는 일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이 시대 문해력의 열쇠를 여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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