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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도 30분 여유에서 나옵니다

우주에서 지구로 보내는 편지

by Helen J

여러 가지 싫어하는 것들이 있지만 그중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건 약속된 시간보더 늦었을 때 가면서 겪는 발 동동 모드다. 오늘 아침부터 좀 거리가 있는 곳에 강의 오느라 시외버스를 타고 왔는데 9시 반으로 연락 왔던 강의가 9시 시작이라는 거다!! 발 동동 모드의 극한으로 가면 오히려 내가 현실에서 유리되어, 우주에서 한같 미물인 나를 돌아보는 모드로 전환된다. 이때 오히려 이상한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는, 그런 가장 위험한 상태에서 아침을 보냈다. 오전 강의를 마치고 쉬는 시간이 돼서야, 우주에서 지구로 천천히 내려오며 각종 민망함을 지금 느끼고 있다.


요즘 내 유튜브 알고리즘에 자주 등장하는 인사가 있다. 실리콘벨리에서 퇴직 후 여러 알바를 하며 스스로를 다른 방식으로 한번 더 증명해 낸 Lois Kim이라는 분인데, '핫한 인사의 증명소'가 돼버린 유퀴즈도 나온 분이란다. 어쩌다 피트니스에서 운동하는 중에 쭉 한번 연결되어 나오는 그분 영상들을 보았다.


생의 에너지가 쨍한, 정말 환한 느낌. 뭔가 기시감이 들었다.


예전에 실리콘벨리에서 근무하는 내 친구를 볼 겸 서부에 간 일이 있었다. 일주일 정도 같이 지내면서 그 친구의 삶의 리듬에 함께 맞춰 지내보았다. 친구는 일상을 만개한 꽃처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쨍하게 지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잠깐이라도 독서하고, 정말 자신을 다 소진할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와서, 나에게 이것저것 보여주고 싶어서 여기저기 데리고 가주는, 좋은 친구역할도 놓치지 않은 슈퍼휴먼. 원래도 뭐든 해 낼 것 같은 친구임을 알았지만 일주일간 바로 옆에서 그 에너지 속에 있다 보니 뭔가 나도 쨍하게 일상을 살아내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며 가며 친구가 보여준 그 주변분들도 그랬다. 털털하게 후디하나 걸친, 오히려 꾸미고 나타나는 게 거추장스럽고 촌스러울 거 같은, 그 강한, 효율적 삶의 에너지가 충만한 마을분위기가 전해져서 나도 하루하루 꽤 열심히 여행자로서의 일주일을 살아내었다.


그런데 어쩌다 지난 토요일 Lois Kim이 하는 강연회 초대장을 받았다. 뭔가 이건 신기한 우연의 일치인가 싶어 좀 무리한 일정이었지만 시간을 내었다. 그날 밤까지 준비해야 할 프레젠테이션이 있었는데, 뭔가 Lois Kim에게 에너지를 받아 나도 그 서부에서 느꼈던, 쨍한 에너지의 하루를 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강연도 듣고, 와서 몇 시간 만에 프레젠테이션도 뚝딱 잘 집중해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강연에 참석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난 강연을 듣지 못했다. Lois Kim은 강연에 30분 이상 늦었고, 뭔가 당황한 듯 언제 시작한다고 안내가 없는 주최 측에 물어보기도 뭐해서, 더 기다리지 못하고 할 일을 하러 발길을 돌렸다. 슈퍼지각에 아마 그분도 오늘 아침의 나와 같은, 우주에서 한낱 미물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강의실에 오지 않았을까.


‘다정함도 체력에서 나옵니다’

Lois Kim은 이런 제목의 책을 발간하고, 짬 내서 잠깐이라도 ‘스낵 운동’하자고 권한다. 꽤 멋진 말이다. 체력 이상의 무언가를 해내며 다정까지 기대하긴 어려우니까.


그런데 나는 슈퍼지각인 주제에, 오늘 좀 다른 생각이 든다. 어쩌면 자신이 가진 체력에 기대어, 그날 해 낼 수 있는 일과 다정함의 한계치를 높이려는, 그런 태도는 나에게, 세상에게 비다정한 거 아닐까. 하루 속 은은한 빛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그저 쨍쨍하게 24시간 백야처럼 살자고 나에게 무리를 요청하는 건 아닐까.


내 오늘 아침 30분만 더 있었으면, 버스아저씨에게도, 택시아저씨에게도 감사합니다! 더 산뜻하게 다정하게 인사하고 내리고, 강연 와서도 충분히 웃으면서 분위기를 보아 가며 이런저런 농담도 던졌을 텐데.


오후 강의를 앞두고 여유를 찾아가는 내가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다정함도 30분 여유에서 나옵니다’라고.

모두의 여유 있는 하루를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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