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적으로 처방받아야 하는 약이 있어 두 달에 한 번 병원을 방문한다.
두 달 전, 평소처럼 병원을 찾았더니 새로운 의사 선생님이 와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한눈에 봐도 아주 젊은 의사였다.
솔직히 의사가 너무 젊으면 실력에 대한 의심이 들 때가 있지만,
어차피 나는 늘 같은 약을 처방받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젊은 의사 선생님은 세상 유쾌한 분이여서
3분 남짓한 상담을 마치고 병원 문을 나설 때,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두 달이 흘러 어제, 다시 병원을 찾았다.
그 선생님은 여전히 그 방, 그 자리에 계셨고,
변함없이 유쾌하고 상쾌하고 발랄했다.
"그동안 별일 없으셨어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처음 들어보는 인사말이었다.
"네~ 그럼요. 선생님이 바뀌었을까 봐 걱정하면서 왔네요."
"하하하,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습니다, 하하하."
처방받은 약을 사러 약국으로 걸어가는 길,
의사 선생님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보험회사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사실 이 보험사는 이미 여러 차례 나에게 불쾌한 경험을 안겨준 곳이다.
그래도 콜센터 직원들은 서비스 교육을 받았을 테니 괜찮겠지 기대하며
필요한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상담원 연결을 눌렀다.
우선 그동안 겪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보험사로부터 메일을 받았고,
메일에는 '반드시 지점을 방문하라'라고 되어 있었고,
지점에 갔더니 지점장조차 업무를 제대로 알지 못해 우왕좌왕했고,
그 와중에 상품을 팔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겨우 빠져나와 콜센터에 전화했더니,
그 일은 지점이 아니라 콜센터에서 처리할 수 있다고 했고,
그래서 오늘 다시 전화를 한 것이다.
"이 일을 처리해 주세요"가 내 요청이었다.
그런데 상담사의 반응이 예상을 벗어났다.
불만 접수 고객으로 착각했는지 절차 설명을 장황하게 이어갔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래서, 그 일을 처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죠?"
그 순간, 상담사의 목소리가 변했다.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지친 기색과 한숨 섞인 짜증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입으로 설명이 이어졌지만,
내 귀에는 그녀의 마음속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넌 그만 말해. 내가 설명하고 있잖아.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교육담당자로 일하면서 처음 개발했던 교육과정이 CS 교육이었다.
그 때문인지 나에게는
고객 입장에서 경험하는 서비스를 자세히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
약간 까다롭게 평가하는 편일지도 모른다.
다만, 고객 접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너무나 잘 알기에,
개인적 실수나 태도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다.
대신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느껴지면
고객센터 등에 개선 요청을 하고 피드백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에 경험한 의사 선생님과 콜센터 상담사의 사례는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의 인성'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의사 선생님의 발랄함이 병원에서 주는 높은 월급 때문일 수도 있고,
상담사의 짜증 섞인 태도는 인력 부족으로 인한 피로감 때문일 수도 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다닌 병원은 동네의 작은 병원이고
의사 선생님이 자주 바뀌는 것을 보면 급여가 특별히 높을 것 같지 않았다.
콜센터 상담원 역시 마찬가지다.
인력 부족으로 콜이 몰리는 상황은 분명 스트레스 요인이지만,
그 또한 불친절의 핑계가 될 수는 없다.
(참고로 콜센터 상담원들은 교육받는 것을 아주아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교육 시간 동안만이라도 콜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스템 탓으로만 돌리기엔 한계가 있다.
'서비스는 시스템이다. 개인에 따라 품질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이번 경험을 돌아보며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직무에 맞는 인성을 가진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기업체 HR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 '실력보다 인성을 본다'는 기사를 많이 본다.
성격 더러운 나로서는 살짝 심사가 뒤틀리는 내용이다.
다시 취업할 일은 없겠지만, 사회생활은 계속된다.
'성격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 늙은 나이지만 이제라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