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책 출간 과정의 기록
출판사로부터 도착한 메일의 후반부는, 출판 환경이 어렵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출간과 관련된 조건을 안내하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을 대략 정리하면…
최근 출판사들은 미디어 환경 변화로 신간 출간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음
이에 따라 저자가 일정 부수를 구매하거나 출판지원금을 부담하는 기획출판 방식이 일반화됨
출판지원금을 부담할 경우, 인세율은 높게 책정됨
약 1,000부 판매 시 손익분기점에 도달, 저자에게 인세로 지원금이 환급되는 구조
재판부터는 저자 부담 없이 출간 가능, 인세율은 초판과 동일하게 유지됨
나는 자칭 ‘재야의 은둔 고수’지만, 인지도는 1도 없는 프리랜서이고 내가 쓴 원고는 특정 직무의 세부 업무에 관한 전문서적이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비 출판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 들어 본 적은 있었지만, 막연히 내 책은 좀 다르겠지 생각했었나 보다. 그야말로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막상 조건을 제시받고 나니 예상치 못했던 일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이후 여러 차례 메일을 주고받으며 구체적인 비용과 세부 조건을 확인했다. 내게는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금액이었는데 과연 내 책이 초판 1,000부 이상 판매될 수 있을까? 저자 입장에서 본전을 뽑을 수 있을까? 고민이 시작되었다.
머리가 아팠다. 리프레시 겸 ChatGPT와 수다나 떨자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져 보았다.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지인들 중에 이미 책을 출간한 사람이 많은데
한 번도 그들로부터 자비로 출판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어.
기획 출판을 해놓고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은 걸까?”
ChatGPT의 답은 명쾌했다. 요약하자면…
강사, 코치, 컨설턴트 등 전문가 그룹은 대부분 기획출판 또는 반기획출판(출판사 일부 지원 + 저자 부담) 형태로 책을 냄
저자 부담금에 대해 잘 말하지 않는 이유는 자존심 때문인 경우가 많음.
‘출판사가 선택한 책’과 ‘내가 돈을 낸 책’ 사이의 이미지 차이를 의식하기 때문인데 실제로는 “투자” 또는 “마케팅 협력 차원”으로 포장해 설명하는 경우도 있음
출간 자체가 전문가로서의 포지셔닝 수단이기 때문에 부담 여부보다는 ‘출간했다는 사실’을 강조함
현실적으로 첫 책은 거의 대부분 저자 부담이 일부 포함되며 이후 이름이 알려진 뒤 출판사 전액 부담으로 출간되는 경우도 있음
'옳거니! 너희들 다 나한테 딱 걸렸어! 다들 자비 부담이었구나~' 다른 사람의 숨겨진 비밀을 우연히 알게 된 것 같은 통쾌함을 잠시 즐기고 나서, 다시 나의 고민으로 돌아왔다. 저 돈을 부담해, 말아? 책을 출간하고자 했던 나의 초심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출판사에 메일을 보냈다.
(전략)
사실 저는 이번 책 출간을 통해 인세를 기대하거나, 프리랜서 프로필에 들어갈 ‘저서 한 줄’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식노동자로서 제가 지난 시간 동안 현장에서 고민하고 연구해온 결과물을 눈에 보이는 결실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HRD 현장에서 일하는 후배들에게 머릿속에서 흩어져 사라지는 지식이 아니라, 업무 중 수시로 참고하며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질적인 매뉴얼을 선물해 주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중략)
머지않은 시일 내에 마음의 결정을 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메일이 오가는 동안, 다른 출판사 한 곳에서 전체 원고를 보내달라는 요청 메일이 와서 바로 전송했다. 그리고 출간 제안할 출판사 리스트에는 없었지만 비장의 카드로 마음속에 숨겨 두었던 곳에 새로운 출간 제안 메일을 보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을 조금 더 늘려 둘 필요가 있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