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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장|인연의 실, 가을의 은행나무에 걸렸다.

가을에 다시 걸린 마음

by Helia

예약 발행 시간 설정 오류로 인해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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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ítězslava Kaprálová – “Suite en miniature for Strings, IV. Lento – The Twilight Calm Before the Autumn Winds”

(비체슬라바 카프랄로바 – 「작은 모음곡」 중 4악장 가을바람이 불기 전 황혼의 고요)


가을이 오면 이상하게 마음이 먼저 흔들린다. 바람이 살짝만 스쳐도 오래 잠들어 있던 감정들이 어지럽게 깨어나고, 잊었다 믿었던 이름들이 문득 귓가를 스친다. 어느 계절보다도 이 가을이 가장 무심하게 사람의 마음을 불러내는 데 능숙하다. 그중에서도 은행나무 아래를 지날 때면 유독 발걸음이 느려진다. 노란 잎이 흘러내리는 길 위에서, 나는 늘 한 가지 착각을 한다. 떨어지는 잎 사이에 내가 놓쳤던 인연의 실이 다시 걸려 있는 듯한 착각. 바람 속에 떠돌던 오래된 마음이 은행나무에 잠시 쉬어간 듯한 느낌.

그해 가을도 그랬다. 햇빛에 노랗게 씻긴 가로수길을 걸으며 나는 깊은 생각 없이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은행잎들이 금빛 파편처럼 흘러내렸다. 문득 시선 한가운데 아주 가는 무언가가 반짝였다. 실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흰 실이 은행나무 가지에 걸려 햇빛을 머금고 있었다. 처음엔 거미줄인가 했는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그것은 분명 누군가의 손에서 떨어져 나온 얇은 실이었다. 바람에 떠밀려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그 순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아, 이건 인연의 실이구나.”
누군가를 향해 조심스레 내민 마음의 흔적이 바람결을 따라 떠다니다가 이 가을의 나무에 걸린 것만 같았다. 누군가에게 닿지 못한 채 흘러가버린 말, 오래전에 끝났지만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감정, 미처 이어지지 못한 채 놓쳐버린 관계의 잔흔 같은 것들. 그 모든 것들이 이 가을 오후에 은행나무 아래에서 형체를 만들어 나타난 듯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인연은 이어지는 거고, 끝나는 건 인연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어지지 않았어도, 오래 머물지 못했어도, 우리를 한순간이라도 움직이게 만들었던 마음은 모두 인연이었다. 단지 그 실이 어디에 걸렸는지 우리가 모를 뿐이다. 어떤 실은 누군가의 손길에 매듭이 생기고, 어떤 실은 스쳐 가던 계절에 엉뚱한 나뭇가지에 걸린다. 그리고 또 어떤 실은, 이 얇은 실처럼, 떠밀리다 떠밀리다 우연의 힘으로 갑자기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실들을 던진다.
누군가를 향한 관심, 말하지 못한 애정, 주워 담지 못한 오해, 너무 늦게 도착한 진심.
이 모든 것이 가느다란 실이 되어 바람 속을 떠돈다.
우리는 우리가 던진 실 대부분의 행방을 모른 채 살아간다.
다만 어느 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실 하나가 다시 눈에 걸릴 뿐.

나는 그 실을 바라보며 오래 전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몇 년 전 가을, 나는 어떤 사람에게 하지 못한 말을 마음속으로 백 번쯤 되뇌었다. 바람이 불면 그 사람의 뒷모습이 훅 떠올랐고, 은행잎이 날리면 그동안 품고 있던 말들이 잎에 실려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계절은 계속 바뀌었지만, 그 마음은 이상하게도 가을마다 되살아났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어느 가을만 되면 그 이름이 다시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스르르 솟아올랐다.
그때의 실이, 바로 지금 이 은행나무에 걸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조용히 스쳤다.

인연이란 붙잡는다고 이어지는 것도, 놓는다고 끊어지는 것도 아니다.
내가 붙든 마음이 있다고 해서 상대도 그것을 받아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반대로, 내가 놓았다고 생각해도 마음의 실은 어디엔가 매달려 남아 있다.
인연의 실은 끝나지 않는다.
단지 다른 위치로 옮겨가고, 다른 계절에 다시 나타날 뿐이다.

은행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실에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금빛 잎은 실을 감싸듯 스치다가 이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한 가지가 선명해졌다.
“아, 나도 이제 이 실을 보내도 되겠구나.”
오랫동안 품고 있던 미련과 그리움, 차마 정리하지 못한 감정들이 잎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사람은 어떤 마음을 떠나보낼 때, 슬픔보다 가벼움이 더 크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은행나무 아래에 서서 실이 흔들리는 모습을 다시 바라봤다. 바람이 조금 더 세게 불었지만 실은 끊어지지 않았다. 떨어질 듯 말 듯, 그 비현실적인 존재감은 오히려 더 단단해 보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인연은 우리가 만들려고 애쓴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
때가 되면 저절로 덮고, 저절로 떠오르고, 저절로 풀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좋았던 인연은 좋은 기억으로 남고, 아팠던 인연은 깊은 성찰을 남긴다.
짧은 인연은 흔적이 선명하고, 긴 인연은 온기가 오래간다.
애틋했던 인연은 마음 한복판에서 오래 머물고,
놓쳐버린 인연은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어떤 인연은… 이렇게 은행나무에 걸린 실처럼 말을 걸어온다.
“그때의 마음, 이제는 보내도 괜찮아.”
“너는 이미 충분히 애썼어.”
“멈췄던 시간이 이제 다시 움직여도 좋아.”

나는 실을 떼지 않았다.
억지로 끊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 실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의 마음에서 떨어져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지금 내게 도착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인연은 이유보다 ‘도착’이 먼저다.
때로는 우연이 인연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하고,
우리가 잊고 사는 동안 실은 조용히 길을 찾아오기도 한다.

길을 되돌아 걸으며 나는 마지막으로 은행나무를 바라보았다.
햇빛은 조금 더 기울어 있었고, 바람은 전보다 부드러웠으며,
실은 여전히 가지에 걸린 채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실이 더 이상 미련으로 보이지 않았다.
과거를 붙잡는 끈이 아니라
새로운 계절로 나를 이끄는 다리처럼 느껴졌다.

가을은 늘 이렇게 오래된 마음을 환기시키는 계절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다시 아프지 않도록
이 계절은 또 다른 선물도 건넨다.
더 이상 붙잡지 않아도 되는 실,
더 멀리 흘러가도 괜찮은 마음,
그리고 언젠가 도착할 새로운 인연의 자리.

나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속도로 깨닫고 있었다.
진짜 인연은 떠난 뒤에도 흔적을 남기고,
끝난 뒤에도 마음을 움직이며,
잊힌 뒤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계절에 다시 걸린다는 것을.
그 실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몰라도,
지금 이 순간, 그것이 은행나무에 걸려 나에게 왔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충분한 의미가 된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 나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중 얼렀다.
“은행나무에 걸린 인연의 실이여, 네가 누구의 마음에서 온 것이든
이제 네 계절로 흘러가도 괜찮다.”

그리고 바람은, 마침내 아주 고요하게 불어왔다.
마치 오래된 마음이 조용히 풀리는 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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