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더 피어나는 마음
추천 클래식
알베르투스 루카스(Albertus Lukas)
〈Four Meditations on the Quiet Unfolding of Light in Early Spring〉
(초봄의 고요한 빛이 서서히 펼쳐지는 순간에 대한 네 가지 명상)
봄은 항상 사람 마음보다 늦게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늘 먼저 도착한다. 아직 아무 꽃도 피지 않았는데도 어느 날 문득 가슴 한가운데 조용한 진동이 스며드는 순간이 있다. 이유 없는 설렘이 조금씩 번지고, 특별한 일이 없었는데도 마음이 살짝 들떠 있다면, 이미 봄은 들어와 있는 것이다. 몸은 겨울의 온도를 붙잡고 있지만 마음은 가장 먼저 계절의 문을 열어젖힌다. 그래서 봄을 기다린다는 말은 틀렸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나를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매년 어색하게 봄과 마주 앉는다. 마치 오래 연락하지 않았던 지인이 갑자기 찾아와 ‘잘 지냈어?’ 하고 인사를 건네는 순간처럼, 반가움과 불편함이 미묘하게 뒤섞인 표정을 띄운 채.
봄이라 하면 단연코 벚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핑크빛으로 물드는 거리와 나무 아래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은 그 자체로 봄의 초상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벚꽃은 늘 풍경보다 마음을 먼저 물들인다. 꽃이 피기 전부터 우리는 마음을 핑크빛으로 칠해놓는다. 기대와 두려움, 설렘과 망설임이 뒤섞인 채 눈에 보이지 않는 꽃잎을 상상한다. 날씨만 괜찮다면, 아니 몸이 크게 아프지만 않다면 그 풍경 속을 걸을 수도 있을 텐데. 그래서일까. 벚꽃을 걷는 일은 단순한 구경이 아니라 마음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이기도 하다.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피지만 그 아래를 걷는 나는 늘 다른 사람이니까. 꽃은 변하지 않는데 내가 변해 있다. 나이도, 표정도, 마음도. 그래서 벚꽃은 계절이 아니라 거울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봄을 밝은 계절이라 말하지만, 나는 봄 앞에서 오히려 긴장한다. 시작이라는 단어엔 언제나 묵직한 책임이 뒤따르고, 새로운 계절은 내가 놓친 시간들을 들추어내는 듯하다.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놓아야 할지를 정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 그 앞에서 나는 자꾸만 숨을 고르게 된다. 하지만 어쩌면 봄의 시작은 그처럼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아주 작은 움직임일지도 모른다. 겨울 동안 굳어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려나가고, 견고했던 혼란이 서서히 갈라지는 과정을 스스로 감지하는 일. 마치 얼어붙어 있던 강물의 표면이 서서히 녹아 흐를 길을 만드는 것처럼. 봄은 그저 그 흐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겨울의 끝자락은 유난히 고독하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피로해지고, 자신에게조차 무심해지는 날이 많다. 잠에서 깨도 하루가 무겁고, 잠들어도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다. 그럴 때면 계절이 바뀐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봄꽃 개화를 기다린다며 설렌다지만, 내겐 여전히 겨울이 길게 눌러앉아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바뀌어 있다. 색은 전과 같은데 온도가 다르다. 햇살이 조금 더 길게 방 안을 머물고, 바람이 목덜미를 차갑게 할 것 같으면서도 은근하게 따뜻하다. 그런 날이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래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천천히 떠오른다. 아직 말을 걸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들이 작은 기척을 내며 깨어난다. 그 순간, 아. 봄이 왔구나. 말하지 않아도 안다.
봄은 항상 ‘변화’를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로 봄이 주는 건 변화의 의무가 아니라 여지가 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할 수 있는 여지. 계절이 강요하지 않는다는 게 어릴 적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봄은 늘 번쩍거리는 새것들로 가득했다. 새 교과서, 새 신발, 새 가방. 깨끗한 첫 페이지를 망치지 않기 위해 괜히 긴장했고,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컸다. 그런데 어른이 되니 알겠다. 봄의 새로움은 외부의 물건이 아니라 내 마음이 준비된 순간에만 진짜가 된다는 것을. 준비되지 않은 새로움은 설렘이 아니라 압박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차라리 천천히 시작하는 봄이 좋다. 마음의 온도를 따라가며 계절의 흐름을 익혀가는 그 느린 속도가 편안하다.
누구에게나 봄은 다르게 온다. 어떤 사람은 햇살 하나에도 웃음을 터뜨리고, 어떤 사람은 꽃잎이 흩날리는 풍경 속에서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두 경우 모두 괜찮다. 봄은 누구에게도 ‘기쁘라’고, ‘설레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봄을 누군가의 속도로 맞아야 한다는 규칙도 없다. 그래서 나는 가끔 혼자서 천천히 걸으며 마음속 잔해들을 살펴본다. 어느 부분이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지, 어느 감정이 아직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있는지. 그런 시간을 거치다 보면 봄이 나에게서 조금씩 자리를 찾아간다. 내 속도가 서투르고 느리더라도, 계절은 늘 그 느린 걸음을 기다려준다.
사람들은 화려한 봄을 사진으로 남기고, 그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는 봄의 진짜 매력은 사진으로 담기지 않는 부분에 있다고 생각한다. 꽃잎이 흩날리는 장면보다 풍경을 바라보던 내 표정이 더 중요하다. 아무도 모르게 미세하게 흔들린 내 마음, 잠깐 멈춰 선 발걸음, 의미 없는 듯 보였던 사색. 그 순간들이 모여 하나의 계절을 만든다. 사진은 풍경을 담지만, 계절은 마음을 담는다. 그래서 봄을 기록하는 가장 정확한 방식은 결국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 계절을 건너는지를 아는 것. 그걸 알면 벚꽃이 피든, 비가 내리든, 조금 늦게 따뜻해지든 상관없어진다.
봄과 마주 보는 일은 어쩌면 내 안의 가장 솔직한 상태와 조우하는 일이다. 나는 매년 봄마다 다르게 늙고, 다르게 성장한다. 어떤 해의 나는 상처에 예민했고, 어떤 해의 나는 무던했다. 또 어떤 해에는 아무력감이 밀려와 계절의 변화를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봄은 한 번도 나를 놓친 적이 없다. 계절은 돌아오지만 나는 매년 다른 모습으로 봄을 맞는다. 그래서 봄은 ‘변함없이 다가오는 변화’라는 말이 어울린다. 밖의 풍경은 비슷한데 내 마음만 계속 변해간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데 오래 걸렸다. 나는 변하지 않는 사람이고, 계절만 바뀌는 줄 알았으니까. 지금은 안다. 변화는 계절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먼저 시작된다는 것을.
살아가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나는 왜 여전히 겨울 같다?’ 하고. 분명 달력은 봄이라 말하는데 마음은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다. 어떤 날은 꽃이 피어도 무덤덤하고, 어떤 날은 이유 없이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나를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계절과 다른 속도를 가진 사람일 뿐이다. 계절이 바뀌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잘못된 건 아니다. 봄은 누구에게도 빨리 오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조용히 그 자리를 채울 뿐. 내가 다가올 준비가 되면 그제야 나를 맞아주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요즘 내 마음이 조금 늦게 피어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피는 꽃이 더 오래 남는 법이니까.
봄은 돌아오는 계절이지만, 매번 그 얼굴은 다르다. 올해의 봄은 유난히 조용하다. 별다른 화려함 없이 부드러운 그림자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올해의 봄을 좀 더 정면으로 마주 보고 싶다. 나를 재촉하지 않고, 부담 주지 않는 온도. 그 온도를 잃지 않도록 하루에 한 번쯤은 숨을 길게 들이마신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햇살이 벽을 기웃거리는 순간을 바라보고, 마음속 작은 떨림들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봄을 제대로 느끼는 건 멀리 있는 특별한 풍경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소한 기척이다. 그렇게 계절은 몸이 아니라 감정에서 먼저 시작된다.
나는 매년 봄을 조금씩 다르게 해석한다. 예전엔 ‘시작’의 계절이라 생각했고, 어느 해에는 ‘회복’의 계절이었다. 또 어떤 해에는 ‘정리’의 계절이기도 했다. 올해의 봄은 ‘마주 봄’이다. 봄을 마주 본다는 뜻이기도 하고, 나 자신을 다시 바라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 안의 겨울을 억지로 떨쳐내지 않아도 되지만, 그 겨울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이 봄의 시작이다. 나는 그 순간을 발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주변이 환해져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밝아지는 순간에 진짜 봄이 온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한다.
봄을 마주 본다는 건 결국 이런 일이다. 내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천천히 인정하는 일. 계절보다 내가 먼저 피어난다는 걸 아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내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해 보려 애쓰는 일. 그러다 보면 어느새 벚꽃이 피어 있고, 그 아래를 걷고 있는 내 발걸음도 조금은 가벼워져 있다. 벚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아래서 웃을 수 있는 내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해의 나는 이렇게 말한다. 봄, 마주 봄.
계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계절 속에서 다시 나를 바라보는 시간. 봄은 결국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