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봄이 되는 사람
너라는 사람은 노란 튤립이었다. 처음에는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눈에 띄게 화려하지도 않았고, 말을 건네는 방식도 조심스러웠다. 그래서인지 스쳐 지나가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번 보고 나면 시선이 자꾸 그 자리에 머물렀다. 다시 확인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 존재. 노란 튤립이 늘 그렇듯, 눈을 사로잡지는 않지만 한 번 들어온 기억은 좀처럼 빠져나가지 않는다.
너를 처음 떠올리면 언제나 봄의 중간쯤이 함께 온다. 아직 완전히 따뜻해지지 않은 공기, 햇살은 부드러운데 바람에는 겨울의 끝자락이 남아 있던 날들. 사람들은 보통 봄의 시작이나 끝을 기억하지만, 너는 늘 그 사이에 있었다. 계절이 넘어가는 틈, 마음이 가장 쉽게 흔들리는 지점. 노란 튤립이 피어나는 시기처럼,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타이밍에 조용히 서 있었다.
너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쪽에 가까웠고, 감정을 설명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차갑다는 오해를 받기 쉬웠다. 하지만 곁에 오래 머물수록 알게 된다. 너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배려였고, 무심함처럼 보이던 태도는 생각이 많은 사람의 습관이라는 걸. 노란 튤립이 향기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듯, 너는 존재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 같았다.
너와 나눈 대화들은 늘 말보다 표정이 먼저 남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각도, 웃음을 삼키다 흘러나온 숨,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마주치는 순간. 그 사소한 움직임들이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전했다. 노란색이라는 색이 그렇다. 따뜻하다고 설명하지 않아도, 옆에 서기만 하면 알게 된다. 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너는 위로의 말을 잘 고르지 못했다. 대신 끝까지 듣는 법을 알고 있었다. 내가 말을 멈출 때까지 끼어들지 않았고, 결론을 대신 내려주려 하지도 않았다. 그 태도 덕분에 마음이 덜 다쳤다. 누군가는 빠른 공감을, 누군가는 큰 위로를 주지만, 너는 그보다 먼저 안전한 침묵을 건넸다. 노란 튤립이 바람에 흔들려도 소리를 내지 않는 것처럼, 너는 감정의 소음을 만들지 않았다.
너와 함께한 시간들은 특별한 사건으로 남아 있지 않다. 대신 아주 사소한 장면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창가로 기울던 오후의 빛, 식어 가는 커피잔, 아무 말 없이 나란히 걷던 짧은 거리. 그 평범함이 이상하게도 오래 남았다. 화려한 꽃다발보다 한 송이 노란 튤립이 더 오래 기억되는 이유처럼, 너는 기억 속에서 서서히 밝아지는 사람이었다.
기분이 좋을 때조차 너는 요란하지 않았다. 웃음은 크지 않았고, 행복은 낮은 온도로 번졌다. 대신 오래갔다. 노란 튤립이 화단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는 방식과 닮아 있었다. 한 송이만 보면 대단해 보이지 않는데, 어느 순간 그 자리가 환해져 있다. 너는 늘 그렇게, 나도 모르게 마음의 표정을 바꿔 놓았다.
가끔은 네가 조금 더 다가와 주길 바랐다. 먼저 손을 내밀어 주길, 확실한 말을 해주길 기다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너는 늘 한 발짝 뒤에 머물렀다. 다가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다가올 시간을 남겨 두는 방식으로. 그 배려는 때로 서운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덕분에 상처를 덜 입었다. 노란 튤립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햇빛이 충분해질 때까지 묵묵히 기다릴 뿐이다.
너는 떠날 때조차 조용했다. 이유를 길게 늘어놓지 않았고, 감정을 흩뜨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화려하게 무너지는 관계보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이별이 훨씬 깊게 스며든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노란 튤립이 시들 때도 그렇다. 마지막까지 소리를 내지 않고, 계절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사람들은 흔히 강렬한 색에 끌린다. 붉은 장미처럼 분명한 사랑, 보랏빛 꽃처럼 신비로운 관계.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가장 오래 곁에 두고 싶은 색은 노란색이라는 걸. 부담 없이 바라볼 수 있고, 오래 보아도 피로하지 않은 색. 너라는 사람은 바로 그런 존재였다. 처음에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없어서는 안 될 온기가 되었다.
이제는 안다. 너를 잃었다기보다, 한 계절이 지나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는 걸. 봄은 매년 돌아오지만, 같은 봄은 다시 오지 않는다. 노란 튤립도 해마다 피어나지만, 그때의 빛과 바람, 함께 있던 마음은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너는 여전히 노란 튤립으로 남아 있다. 기억 속에서 시들지 않는 꽃으로, 마음 한쪽을 조용히 밝혀 주는 색으로.
너라는 사람은 노란 튤립이었다. 크게 외치지 않아도, 곁에 서 있기만 해도 봄이 왔다는 걸 알게 해 주던 존재. 이제는 만질 수 없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해지는 기억. 그래서 나는 이제, 노란 튤립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누군가를 오래 기억하게 되는 이유는 늘 이렇게 조용하다는 걸, 너를 통해 배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