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확산과 그림자 속 정의
차가운 바닥에 무릎이 닿았다. 아진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축축한 공기 속에는 피비린내와 기계유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손목이 조이듯 묶여 있었고, 눈을 가린 천 너머로 어슴푸레한 빛만이 깜빡였다. 민호의 기척은 가까웠지만,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낯선 발소리들, 긴장으로 굳은 숨소리, 그리고 누군가가 휴대전화를 받는 소리만이 이 긴 정적 속에서 무겁게 울렸다.
"류성민 의원님, 방송은 처리됐습니까?"
"빌어먹을. 송출은 됐지만, 그딴 건 곧 끊긴다. 지금부터는 역정보를 뿌려. 미친 음모론자들이라고 몰아붙여. 여론은 그렇게 쉽게 조작할 수 있어."
그 말에 아진은 이를 악물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대응. 그는 진실이 드러나도 언제든 다시 조작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진은 안다. 한번 틈이 벌어진 진실은 결코 이전처럼 감춰지지 않는다는 것을.
잠시 후, 시야를 가렸던 천이 벗겨졌다. 아진의 눈앞에 펼쳐진 곳은 폐쇄된 공장의 한복판이었다. 조명은 거의 꺼져 있었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울렸다. 바닥엔 해킹 장비, CCTV 캡처, 실험 관련 문서들이 흩어져 있었고, 민호는 맞은편 기둥에 묶여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이제 어쩔 셈이야, 민호야?" 아진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최선을 다했지만... 우리가 너무 쉽게 당했어요, 누나." 민호는 말끝을 흐렸다.
잠시 뒤, 구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류성민은 짧게 웃으며 그들 앞에 섰다. 고급 정장 차림, 하지만 피로에 절은 얼굴에는 광기 어린 미소가 스며 있었다.
"희망 같은 걸 아직 품고 있나? 괜히 진실 따위에 기대하지 마. 세상은 진실보다 더 자극적인 것에 흔들린다는 걸, 너희도 잘 알잖아."
그 순간, 그의 전화기가 울렸다. 무심하게 받아 든 그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 뭐라고? 송출이 아직도 안 끊겼다고? 무슨 헛소리야! 네가 직접 확인해!"
류성민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통화 상대에게 소리치며 경호원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긴장감이 공기 속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사정기관에서? 우리가 내린 수배가 아니라, 그쪽에서 수사에 착수했다고? 누가 지시했지? 누구야, 대체!"
그의 외침은 점점 격렬해졌다. 이제 그는 통제력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장 출입문이 요란한 굉음과 함께 박살 났다. 새벽빛이 강풍처럼 몰려들었고, 그 안으로 검은 복장을 한 이들이 무리 지어 들어왔다. 얼굴을 가린 그들은 무장한 채 정확한 동선으로 움직였다.
경호원들은 당황해 총을 빼들었지만, 상대는 훨씬 빠르고 정밀했다. 몇 초도 안 되어 모두 제압되었고, 류성민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한 남자가 그의 앞에 섰다. 강렬한 눈빛,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류성민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분명 이 사태의 흐름을 뒤바꾼 자였다.
"류성민 의원. 당신은 국가의 헌정 질서를 파괴하고, 다수의 생명을 유린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반론이 있다면, 법정에서 하시죠."
그는 차갑게 말한 뒤 등을 돌려, 묶여 있던 아진과 민호에게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두 분 덕분에 많은 이들이 진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진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의 손목에 새겨진 문신은 눈에 띄게 드러났다. ‘JD’. 민호의 노트북 화면에 마지막으로 떠올랐던 메시지의 발신자.
"당신은... 누구시죠?"
남자는 짧게 대답했다. "진실이 묻히지 않도록, 가끔은 구원이 필요한 때에만 나타나는 자들입니다. 이름은 필요 없어요."
그는 손짓으로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고, 아진과 민호의 손목을 묶고 있던 밧줄이 풀렸다.
류성민은 여전히 발악 중이었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나는... 나는 다시 돌아올 수 있어!"
하지만 그의 외침은 어느새 메아리조차 되지 못한 채 공장 안에 묻혔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금빛이 붉은 어둠을 밀어내며,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공장의 틈을 비추었다.
아진은 USB를 가슴께에 꼭 쥐고 있었다. 송출은 완료되었고, 진실은 이미 세상 밖으로 나갔다. 그들의 싸움은 끝났을지 몰라도,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민호가 조용히 물었다. "누나, 우리... 살아남은 거 맞죠?"
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그리고 이제, 우리 목소리를 낼 차례야. 진실이 돌아왔다는 걸 모두가 기억하도록."
그 순간, 아진의 전화기가 진동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JD: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정의는 언제나 완전하지 않기에.”
아진은 그 문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붉은 새벽빛 아래, 검은 구원이 지나간 자리에서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과거의 그림자를 뚫고 나와, 이제는 스스로의 빛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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