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도착하던 시절

마음이 먼저 걷던 시간

by Helia

연락도, 지도도, 공유된 위치도 없었지만
우리는 늘 그 자리에서 만났다.
누가 먼저 왔는지, 얼마나 기다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결국 둘 다 약속을 지켰다는 사실뿐이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충분히 살아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깊이 사람을 만났고,
시간에 더 책임졌으며,
약속이라는 말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 시절 약속은 지금처럼 메신저 한 줄로 시작되지 않았다.
오고 가는 눈빛이나,
달력 구석에 쓴 낙서한 줄이 전부였지만
그 하나가 며칠을 버티게 해주는 이유가 되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에는
긴장이, 설렘이, 기다림의 온기가 함께 붙어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지도를 펴본 적도 없고,
도착 5분 전 통화를 한 적도 없었다.
그저, 먼저 도착해 있을지도 모를 그 사람을 향해
조금 더 빨리 걷던 날들.

한 번은 그랬다.
중학생 때, 시내서점 앞에서 친구와 3시에 보기로 했는데
4시가 넘도록 오지 않았다.
공중전화도 주변에 없었고,
돌아가는 길도 어딘가 아쉬웠다.
기다리다 앉은 화단에서
그 애를 향해 혼잣말처럼 말했었다.
“왜 안 오는 거야. 나 그냥 집에 간다?”
그 순간, 건너편 골목에서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는 친구가 보였다.
버스를 잘못 탔다는 말에
나는 화도 못 내고 그냥 웃었다.
그날 이후, 우린 몇 번이나 더 그 서점 앞에서 만났다.

그런 시간은 지금은 없다.
이젠 기다릴 이유도, 기다릴 여유도,
기다려야 할 확신도 사라졌다.

요즘의 약속은 일정이다.
입력하고, 확인하고, 조정하고, 취소한다.
"그날은 좀 애매할 것 같아."
"갑자기 일이 생겼어."
"나중에 보자."
이 짧은 메시지 안에는
변명도, 미안함도, 애틋함도 없다.
그저 편리함의 마침표.

우리는 더 빠르게 연결되지만
그만큼 더 쉽게 끊어낸다.
만남은 번개가 되고,
이별은 ‘톡’이 된다.
그마저도 읽지 않으면,
관계는 읽히지 않은 채로 남는다.

과거를 무작정 그리워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시절의 약속은
시간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는 사실을 잊지 못할 뿐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는 건
그 사람을 향해 ‘간다’는 뜻이었다.
메시지를 보낸다거나
도착을 알린다거나
늦는다고 양해를 구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그 사람에게 가는 일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두 정거장이나 더 걸었던 것도
조금이라도 예쁜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서였고,
날이 흐린 날엔
혹시 우산이 없을까 봐 작은 접이식 하나 더 챙겼던 것도
그냥 마음이었지, 계산은 아니었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친구가 있었다.
그 애는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고,
항상 약속 시간보다 10분은 일찍 도착했다.
나는 늘 허둥대며 5분쯤 늦었고,
그 애는 늘 같은 말을 했다.
“괜찮아. 난 기다리는 거 좋아해.”
그 말이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은, 좋아함 그 자체였다는 걸.

이젠 약속을 할 때도
그 사람을 정말 보고 싶은 건지,
그냥 의무감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대화는 무성하고, 대면은 뜸하다.
이름을 자주 부르지 않아도
온라인상에선 늘 ‘접속 중’이다.
하지만 진짜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은 게 언제였는지
가물거릴 때가 많다.

그 시절, 약속은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과의 거리였다.
하루 중 가장 따뜻한 2시간을
누군가에게 통째로 내어주는 일.
그건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었다.

요즘은
만남이 지워지기 쉽고,
사람도 지워지기 쉽다.
말 대신 말풍선이 남고,
기억보다 캡처가 더 오래간다.
그리고 그 모든 건
삭제가 가능하다.

그렇기에 나는 종종
다시 그런 약속을 그리워한다.

누군가를 향해
‘지금 나간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그저 그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만으로 걷던 그 길.

그땐 약속이
손안에 있지 않았기에
가슴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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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연결 속에서
진짜 도착을 잊고 있다.

만약 다시,
누군가와 그런 약속을 할 수 있다면
그날 나는 말을 줄이고 싶다.
도착했다고 말하지 않고,
얼마나 걸리는지 알려주지 않고,
그저 천천히 걸어
그 자리에서
조용히 그 사람을 마주하고 싶다.

그리고 말없이 웃으며 이렇게 말할 거다.

“기다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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