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춤의 힘
들녘에 바람이 스치면
황금빛 물결이 일제히 일어난다.
햇살을 머금은 이삭들은
고개를 들어 환히 웃는 대신
조용히 땅을 향해 몸을 낮춘다.
어릴 적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란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오래도록 알지 못했다.
나는 남보다 먼저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모기처럼 작게 말했고
하고 싶은 말조차 삼킨 채
늘 위축된 채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그 숙임은 겸허함이 아니라
두려움의 그림자였다.
벼의 숙임과는 다른,
비어 있는 줄기의 떨림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나는 깨달았다.
숙인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삼키거나 몸을 움츠리는 일이 아니었다.
풍요가 알알이 맺힐수록
스스로를 낮추는 지혜,
무게가 깊어질수록
허리를 굽히는 강인 함이었다.
억울함을 삼키던 밤,
눈물 젖은 새벽,
그 모든 기억들이 내 속을 채웠다.
그 무게는 내 어깨를 낮추었고
나는 조금씩 벼처럼 변해갔다.
더 이상 위축이 아니라
겸손의 숙임으로 서고 싶었다.
논둑길을 걸으면
수많은 이삭들이 나를 향해 인사한다.
그 고요한 인사는
사람답게 살라는 부름 같다.
자신을 채울수록
더 낮아지는 법,
고개 숙인 이삭이야말로
세상을 살찌운다.
나는 바람 속에서 속삭임을 듣는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라.”
그 한마디는 내 마음에 깊이 뿌리내린다.
내 삶 또한 언젠가
벼 이삭처럼 기억되기를.
소란한 외침이 아니라
조용한 숙임으로,
허공이 아니라
땅을 향한 겸허함으로.
오늘 나는 배운다.
고개 숙인 삶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계절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