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견디는 꽃의 마음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미 한참 늦어버린 게 아닐까.’ 남들은 계절마다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것 같은데, 나의 시간만 겨울 끝자락에서 멈춘 듯했다. 하지만 어느 날, 유난히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묵묵히 꽃눈을 품은 매화를 보고 깨달았다. 우리네 인생도 결국 그런 나무와 닮아 있었다. 눈보라에 가지가 휘어지면서도 계절이 바뀌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그 꽃처럼, 인간의 삶도 얼어붙은 시간 아래에서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자신만의 겨울을 통과한다. 누구에게는 잃어버린 관계가 그 겨울이 되고, 누구에게는 지나간 청춘이, 혹은 끝내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가 긴 추위가 된다. 나도 그랬다. 아무리 걸어도 밝아지지 않는 터널에 갇힌 듯한 날이 있었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남들보다 늦게 피는 것처럼 느껴질까.’ 하지만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늦게 피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오래 버틴 자가 맞이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느린 속도는 멈춤이 아니었다. 겨울을 견딘 시간만큼 꽃잎의 향은 더 깊어졌고,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흔히 부러워하는 타인의 삶을 보면, 그들이 이미 봄을 맞이한 듯 보인다. 꽃이 한꺼번에 피어난 듯 화사하게 웃고, 모든 일이 때맞춰 흘러가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그들 역시 추위의 시간을 겪었다. 어떤 겨울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길고 고단 했겠지만, 그 계절을 품고 살아낸 시간이 지금의 봄을 만들었을 것이다. 인생은 계절과 다르다. 꽃 피는 시기를 서로 비교할 필요가 없다. 각자의 가지에 흐르는 온도와 햇빛이 다르기에, 같은 나무조차도 같은 날에 꽃을 피우지 않는다.
내가 지나온 길을 떠올려 보면, 참 많은 순간들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기대했던 일이 스르르 무너진 날, 이유 없이 울컥했던 밤,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는 관계, 반복되는 실망과 후회, 그리고 말하지 못해 마음속에만 쌓인 감정들. 그때는 모든 것이 나를 향해 등을 돌린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순간들이 결코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안다.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꽃눈을 단단히 감싸주고 있었던 것이다. 얼어붙은 감정조차도 언젠가 향기가 되는 과정이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얼마나 빨리 피느냐'가 아니라 ‘어떤 겨울을 어떻게 통과하느냐’였다. 길고 고단한 계절 속에서도 스스로를 놓지 않는 마음, 그게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매화는 눈 속에서 더 향기로워진다. 추위를 통과한 꽃잎에는 고요한 강인함이 배어 있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닮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그 속에는 견디고 버텨낸 시간의 무게가 자리 잡고 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겨울이었지만, 그 계절이 있었기에 다시 피어날 수 있었다.
언젠가 정말 길었던 내 겨울이 있었다. 모든 일에 회의적이었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따뜻한 온기가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지고, 노력의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은 날들. 그런데 어느 날, 아주 사소한 순간에서 불현듯 마음이 흔들렸다. 한낮에 불어온 봄바람 때문이 아니라, 오래된 나무 아래 떨어져 있던 작은 꽃잎 하나 때문이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만큼 작고 초라한 잎이었지만, 그 꽃잎이 말없이 건네는 마음이 있었다. ‘너도 결국 피어난다.’ 그 문장이 입술 안쪽에서 천천히 녹아내리듯 마음을 감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인생은 거대한 사건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신 아주 작은 순간들, 이름 붙이기도 어려운 미세한 감정들이 쌓여 어느 순간 삶의 방향을 뒤집어 놓는다. 지친 마음 한 구석을 붙잡아주는 작은 온기, 스친 눈빛 하나, 나를 믿어주는 말 한마디, 오래된 풍경 속에서 나도 모르게 느끼는 감정. 이런 조각들이 모여서 인생의 향기가 만들어진다. 결국 인생은 누군가에게 거창하게 증명할 필요도, 화려하게 포장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저 살아내고 있었고, 그 살아낸 순간들이 나를 조금씩 꽃으로 만들고 있었다.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엔 자신이 끝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반복되는 실수, 쉽게 사라지지 않는 불안,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계속 떠오르는 후회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의심하는 마음조차도 결국 ‘계절의 일부’였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이 전부가 아니듯, 그 감정 또한 인생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살아가며 계속 변하고 있다. 매일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지 않다. 어제보다 더 단단해졌고, 어제보다 더 여려졌다. 그 두 감정이 함께 자라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속도로 피어난다. 어떤 사람은 금세 봄을 맞이하고, 어떤 사람은 몇 해를 돌고 돌아 겨울을 지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늦게 피는 꽃이 더 못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늦게 피는 꽃은 더 오랜 시간을 품었기에 향이 얕지 않다. 그 시간 속에는 상실도, 희망도, 눈물도, 웃음도 모두 녹아 있다. 그 다양한 온도들이 꽃잎에 스며들어 특유의 향이 된다. 그 향을 만드는 과정이 바로 인생이었다.
나는 믿는다. 사람은 어떤 겨울을 지나도 결국 피어난다는 것을. 완벽하게 피어나지 않아도 좋다. 조금 비틀어져도, 뒤늦게 터져도 괜찮다. 중요한 건 ‘피어날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겨울을 견딘 나무가 눈 속에서도 꽃을 틔우듯, 인간도 끝내 자신을 버리지 않을 때 비로소 새 계절을 맞는다. 인생의 계절은 스스로에게 흐르는 온도에서 시작된다. 그 온도가 아주 미약해 보일지라도, 언젠가 꽃잎을 열 만큼 충분히 따뜻해질 것이다.
지금의 나는 내 인생을 하나의 매화라 부르고 싶다. 나를 휘감았던 겨울의 바람도, 떨리던 새벽도, 흩어졌던 꿈들도 모두 이 꽃을 피우기 위한 과정이었다. 봄이 조금 늦어졌을 뿐, 계절은 늘 돌아왔다. 내 삶의 가지 끝에서도 언젠가 향기 짙은 꽃 하나가 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꽃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겨울을 견뎌온 모든 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것이다.
인생은 멀리에서 보면 거대한 계절 같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아주 작은 꽃눈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견딘 시간만큼 더 깊어진 향, 우리가 버틴 날들만큼 더 단단해진 마음, 우리가 놓지 않았던 희미한 희망. 이것들이 모두 모여 지금의 삶을 만든다. 인생은 사라지는 시간이 아니라, 쌓여가는 시간이다. 오늘 내가 견딘 이 하루도 언젠가 향기가 될 것이다.
그러니 서둘 필요도, 조급해할 이유도 없다. 매화가 제 속도로 피어나듯, 나도 나의 속도로 피어나면 된다. 지금이 겨울이라 해도 괜찮다. 꽃은 늘 겨울의 끝에서 피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내 계절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틀림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