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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Apr 18. 2020

닳지 않은 사람에 대한 갈증


  언젠가부터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거북함을 느꼈다.


  일로 만나는 사람들과는 일만 할 뿐, 그 이상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연결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기존의 친구들과 지인들도 조금씩 정리해나갔다. "잘 지내고 있니?", "언제 밥 한 번 먹자"라는 형식적인 인사나 간신히 하는(혹은 그런 연락조차도 하지 않는), 관계라고 할 수 없는 관계들에 대해. 어느 특별한 날을 정해 마음을 굳게 먹고 인연을 딱 끊었다기보다는, 더 이상 '굳이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런 관계들은 대부분, 전화번호만 바뀌어도 자연스럽게 그냥 끊어졌다. 나는 굳이 그들에게 내 전화번호가 바뀌었다고 알리지 않았고, (다행히) 그들도 악착같이 내 번호를 알아내서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인간관계가 점점 좁아졌다.


  불편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서른 즈음을 기점으로 불편한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수록, 어른의 세계에 조금씩 더 깊이 들어갈수록 나는 그 세계에 불편함을 느꼈다. 


  사람들은 점점 이해관계로만 모든 것을 설명하려 했다. 모든 것들을 계산하려 했고, 조금도 손해보지 않으려 했다. 그들의 세계에서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세상의 흐름은 결국 돈의 흐름이었다. 

  그들은 명함과 타이틀로만 모든 것을 단정지었다. 이력서에 한 줄 더 적어 넣는 것을 인생의 자부심으로 여겼고, 자기보다 직급이 높거나 연봉이 높은 사람만을 훌륭한 사람으로 여겼다. 사람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판단하려 했고, 차근차근 관계를 쌓아 올릴 생각을 하기보다는 잠깐 같이 시간 때워 줄 사람을 구하는 느낌이 강했다.


  그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약삭빨라야 한다고.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야 한다고. 그래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 그들만의 뚜렷한 세계관이 만들어졌고, 그 세계관에 어긋나는 사람들은 '순진한 사람', '아직 뭘 모르는 사람', 더 나아가 '답답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불편했다. 

  그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들의 세계관에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논리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받아들였는데, 그들과 말을 섞을 때마다 나는 왠지 강요받는 느낌이었다. 그들의 논리에 대해 나의 의견을 말할 틈 따위는 없었다. 그러면 나는 그저 희미한 미소로 맞장구쳐주는 시늉을 할 뿐이었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미 어느 정도 때가 묻어 만난 사람들이니 그렇다고 쳐도, 순수했던 옛 친구들이 점점 변해가는 게 눈에 보일 때면 나는 언짢아졌다. 함께 밥 먹고 웃고 떠들던 친구들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느리게 흘렀고, 나는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며 어서 이 자리가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함께 있을 때 편안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 불편하거나, 덜 불편하거나. 아무튼 불편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해나가야 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시련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만을 고집하는 사람들과 일을 하고, 대화를 하고, 밥을 먹는 그 모든 시간이 나는 너무나 불편했다.

 

  그렇게 지내는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뭐랄까, 체념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은 다 저렇게 세상을 살아간다'는 생각을 시작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결국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살아가는 건가 보다'하는, '결국 내가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 한, 나는 계속 이렇게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건가 보다'하는 체념. 


  나는 그동안 이게 나의 성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살아가는 라이프스타일이 다르고, 각자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특히 나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만날 때 피로감을 많이 느끼는 성향이라서 유독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가치관에 맞장구쳐주고 싶지 않은 나의 성향의 문제, 그리고 어쩌면 나 또한 나의 가치관에 갇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느 한 블로거를 접하면서 그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블로그는 순수하기 짝이 없었다. 몇 줄 안 되는, 마치 초등학생 일기장 같은 그의 블로그는 시작의 이유와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곧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렸을 때 집에 as기사님이 오셔서 고장 난 가전제품을 뚝딱뚝딱 고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쓱 가시는 모습이 너무나 멋있어서 자기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공업고등학교 전기과, 전문대 기계과를 졸업한 후 현재 전기 관련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렇게 전기 일을 하면서 할머니 방의 등을 LED로 바꿔드리니 할머니가 좋아하셨다는 이야기, 할머니 간식 냉장고를 채워드리는 일을 1년째 하고 있는데 이것만큼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이야기, 그렇게 채워드린 냉장고에서 할머니가 아침 슬라이스 치즈, 점심 불가리스, 저녁 요플레를 챙겨 드신다는 이야기... 


  이 청년의 순수함에 빠져들어 몇 줄 안 되는 그의 블로그 글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내려갔다. 본인의 친구가 앞으로 잘됐으면 좋겠다는 진심 가득한 문장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몇 안 되는) 나의 친한 친구와 이 블로거에게 '쏘큐트퓨어'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로 했다. 친구는 이 블로거가 '하나도 안 닳은 느낌'이라서 좋다고 했다. 나는 적극 공감했다. 닳고 닳은 사람들에게 치여 피곤해하고 속 쓰려하며 불편한 시간만 보내다가, 이런 순수함을 마주하니 주변 공기가 다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이후 '닳고 닳은 사람들'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데, 친구는 매우 격분하며 '순수하지 않고 머리 굴리고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때 탔고', '약았고', '영악해서', 심지어 생긴 것도 '혼탁하다'고 했다. 이목구비가 미인이나 미남일 수는 있으나, 탁한 느낌이라고.) 


  '닳지 않은' 이 순수함은 정직하고 곧다. 이 순수함은 단순하여, 잔머리와는 거리가 멀다. 괜한 겉멋으로 어렵게 빙빙 돌려 표현하지 않고, 굳이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사랑하고, 사랑하며 즐거워한다. 





  사실 이 '닳지 않음'에 대한 갈증은 사람들 모두에게 있는 것 같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이 '닳지 않음'의 가치가 주를 이룬다. <동백꽃 필 무렵>, <낭만 닥터 김사부 2>, <이태원 클라쓰> 등.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챙겨봤는지 이 드라마를 보지 않고서는 주위 사람들과 대화가 힘들었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무정하고 비뚤어진 세상 속에서 사람이 가져야 할 본연의 가치를 소신 있게 밀고 나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건 잠깐이다. 결국 웃는 건 이들이다. 


  톨스토이, 빅토르 위고, 생텍쥐페리 등의 고전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감명을 주는 이유 또한 바로 이 '가치'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져야 할 본연의 가치. 흔히 '인간미'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바로 그 가치. '힘의 논리'와 타협하지 않고, 주위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때 힘껏 사랑하는 바로 그 가치. 


  모두들 살아가는 현실이 힘겨워 다들 어쩔 수 없이 각박하게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래도 우리의 내면에는 그 가치에 대한 갈증이 있다. 모두가 추구하는, 추구해야 하는 공통의 가치. 

  모든 사람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그렇게 순수하게만 살아갈 수 있겠어?"라고 하지만, 사실 다들 알고 있다. 그 가치를 추구하는 게 맞다는 걸. 그렇기 때문에 현실은 어쩔 수 없이 '닳고 닳은 사람'이 되어 살아가면서도 '닳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들을 접하면 우리는 감동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치 기적처럼, '닳지 않은 사람'을 직접 만나기라도 하면 눈물이 다 난다. 내 안에 '닳지 않은 사람'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다. 세상살이는 어렵고, 살아가는 방식은 늘 치열해서, 모든 사람이 (나처럼) 닳고 닳아가는 줄 알았는데, 그 와중에 '닳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안이 된다. 이런 사람은 그 자체로, 나에게뿐 아니라, 이 사회에 있어 어마어마한 복이다. 






 이 '닳지 않은 사람'을 만나고자, 조금씩 용기를 내고 있어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는 일에 (아직까지는) 주저하게 되지만, 

 그래도 힘을 내봅니다. 


 닫아놓았던 나의 세계를 열고 있어요.

 불편하기만 했던 나의 세계가 숨을 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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