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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블 May 08. 2021

인도와 일본과 한국, 그 어딘가의 맛

카레와 커리


한 번 해놓으면 3, 4일은 기본으로 먹는 음식이 곰국만 있는 건 아니다. 카레도 한 냄비 끓여놓으면 몇 번을 나눠 먹는 음식이다.


카레는 신기한 게 늘 자가증식하는 음식 같다. 늘 데울 때마다 같은 양이 남아있다.


엄마는 한 번 만들어놓은 카레를 데울 때면 우유를 반컵 정도 부었다. 우유를 넣어야 식어서 뻑뻑해진 카레가 부드러워진다고 했다. 서너번 데울 때까지 반컵씩 부으면 나중엔 싱거워질 법도 한데 이상하게 맛은 비슷하게 유지됐다. 건더기가 없어진 카레는 어느새 카레국이 돼있었지만.


카레는 엄청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딱히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카레에 들어있는 당근은 걸러먹게 된다. 생당근도 먹고, 볶은 당근도 먹는데 푹 익어 멀컹멀컹한 식감은 아무리 먹어도 적응이 안 된다. 섬유질 하나하나가 혀 끝에 남아있는 기분이다. 카레를 한 그릇 보기 좋게 비워내고 나면 그릇엔 엄지손톱만한 당근만 대여섯개 굴러다니고 있다.


엄마가 만들어주는 카레를 먹을 땐 암묵적 규칙이 있었다. 절대 흰색 티셔츠를 입지 말 것. 카레만 먹으려고 하면 항상 흰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100%의 확률로 카레를 흘렸다. 카레를 안 흘리고 먹었다고 뿌듯해하며 거울을 보면 어느새 가슴 언저리에 노란색 물감이 튀긴 듯 점점이 남아있다.


법적 미성년자를 벗어나자 카레가 아닌 커리의 맛에 익숙해졌다. 3분 카레나 분말 카레가 아닌, 인도 그 어딘가(가본 적은 없다)에서 맛볼 법한 커리는 신세계였다. 노란빛이 도는 갈색의 카레가 아닌 빨간 커리, 초록 커리, 하얀 커리, 색색의 커리가 내 앞에 놓여있었다.


넋을 놓고 커리를 구경하고 있으면 그동안 맡아보지 못한 향신료 향이 코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엇보다 여기엔 당근이 들어있지 않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멀건 국 같은데 한 입 먹고 나면 신기하게 부드러우면서 매콤한 맛이 난다. 그동안 먹었던 카레와 비슷한 듯 다른 맛이.


여러 카레와 커리를 맛보다 안착한 곳은 일본식 카레다. 엄마가 해준 한국식 분말카레와 인도식 커리, 그 어딘가에 있는 맛이다. 엄마가 해준 것보다 조금 더 진한 갈색이고 조금 더 꾸덕하다.


3분카레처럼 일본식 카레도 간편식으로 많이 나오는데 요즘에는 간편식 대신 최대한 만들어 먹으려는 중이다. 비상용 서너개가 창고에 박혀있긴 한데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 주로 먹는 건 고체카레다. 예전엔 일본제품밖에 없었는데 요즘엔 국내 식품회사에서도 고체카레가 꽤 잘 나온다.


엄마 카레 맛에 익숙해져서인지 일단 카레에는 모든 재료를 때려 넣는 맛으로 먹어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 숭덩숭덩 썬 삼겹살도 많이, 감자와 양파, 버섯 같은 채소도 많이. 병아리콩이나 계란이 있다면 그것도 불 끄기 전에 넣고. 대신 당근은 얼씬도 못하게.


백종원 아저씨는 양파를 30~40분 볶아 카라멜라이징을 한 다음에 카레를 만들면 더 맛있다는데 간단식이 너무 거창한 요리가 되는 것 같아 생략한다. ‘막입’이라 그런지 맛의 차이도 거의 못 느낀다.


일본식 카레라고 해도 맛은 엄마가 해준 것과 생긴 것은 비슷하다. 돼지고기며 감자가 수북이 올라간 카레를 밥 위에 얹어 카레라이스로 먹으면 한 그릇을 금세 비운다.


곁들이는 음식은 역시 김치가 최고다. 겉절이보단 적당히 익은 배추김치가 적당하다. 가끔씩은 총각김치도. 밖에서 카레라이스를 먹으면 단무지를 주는 곳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별로.


만들고 보면 양도 엄마가 해준 것과 비슷해진다. 재료를 많이 넣어서 한 냄비 가득 만들어진 거구나.


우유를 조금씩 넣으며 카레를 데워 먹는다. 남은 카레는 냉동실에 넣으면 된다는데 두세번 먹고 나면 카레가 금방 바닥을 보인다. 카레에 이제 막 만든 따뜻한 흰밥 한그릇과 배추김치 몇조각만 주면 냉동실에 들어갈 것도 없이 설거지거리만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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