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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Dec 03. 2022

재회

2017. 11. 30.

2017. 11. 29.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만물에 깃든 하나만을 보라. 그대를 헤매게 하는 것은 두 번째니라.”

-영원의 철학, 카비르의 글 인용-


아내와 톡에서 싸웠다.

아내가 보낸 페이스 톡을 내가 안 받았기 때문이다. 문자도 그냥 메모 수준으로 남겼더니 폭발했나 보다.

나보고 너무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된 것이 내 잘못인가?

어이가 없다. 나는 당신에게 도량 넓은 남자가 되어야 한다?

돌아올 때가 되니 불쑥 꺼내놓는 그녀의 논리.

여행 다니다 보면 톡 바로 답 못주게 되는 거 이해한다.

그것 가지고 내가 뭐라 하는 게 아니다.

늦어도 좋으니 숙소에 돌아오면 잘 들어왔다고 문자 하나 남겨 달라는 게 나의 작은 소망이었다.

밤잠을 설치며 문자 오기만을 기다리다 보면 내가 지금 뭐하는가 싶고 다음 날 아침 아무렇지도 않게 사과 하나, 안부 하나 없이 변명만 늘어놓던 당신이 아니던가?

그래서 나도 <무관심하기로 결심한 거다.>

나도 여행을 가게 되면 연락 두절할 테니 당신도 느껴보시라 했다.


이 때 내 마음이 딱, 이랬다. 온기 없는 태양.


중요한 건 마음이다.

나는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하고 그렇게 살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런 무관심은 작위나 복수 같은 검풀의 동기가 아닌, 자연스러운 심정의 발현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아마 일상에서도 무관심은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아내, 그대여!

그대는 왜 여행지에서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불러왔는가?

나의 마음은 이제 어찌할 수 없다.

당신이 여행지에서 연락이 두절되었을 때, 나는 수많은 낮과 밤을 베개에 콕 하니 얼굴을 묻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졸리거나 눈이 쓰려 눈을 감은 게 아니었다.

그럴 때면 침대를 가로질러 스스로 물었다.

“외롭니?”


이게 외로운 건가?

눈을 감으니 아이들 목에 맨 방울소리, 시계 소리, 내 숨소리가 전부여서..... 나머지 공간에 무엇이 있는지 보곤 했다. 이건 외로움이 아니었다. 그리운 거지.

그런데 무반응에 너무 지쳐버린 걸까? 어느새 내 마음은 무관심으로 변해 있었다.

어쩌면 자기 보호 본능이 발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병엔 무관심이 약이니까.....



2017. 11. 30.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한 끼 줍쇼에서 백혈병에 걸린..... 그러나 맞벌이에 자녀 셋을 둔 여성의 사연을 보았다.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만물에 깃든 하나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

눈물을 훔쳤다.  어제 사납게 몰아낸 아내에게 페이스 톡을 보낸다.  다정함을 담아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보고 싶었던 순위에서 난 이들 뒤에 있었다.


2017. 11. 30. (BY 아내, IN 방콕)

끝났다. 나만의 여행.

좋았는지 싫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했고 알지 못했던 것을 알았다는 것이 중요하리라.

이제 어딜 가든 영어나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었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도 줄었다.

이건 작은 변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던 사람이 이젠 혼자가 되어도 괜찮을 사람이 된 거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물론 잃은 것도 있다. 당연히 돈과 시간을 소비했고 불필요한 감정도 소모했다.

무엇을 얻고자 하는데 잃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것도 수확이다.

이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떠난 배를 기다리는 선착장..... 늘 누군가는, 언젠가는 한번 정도 선착장이 되어아 한다.


잃은 것 가운데 남편의 마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 그에게서 톡이 왔다. 다정한 목소리가 느껴졌다. 마음이 놓인다.



2017. 12. 01.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이제 올해의 마지막 달이 찾아왔다.

그리고 우리의 재회도 잠시 후 찾아온다.

어제저녁 청소하고 이것저것 한다고 했는데 빠진 게 있었다. 오늘 아침엔 창문에 뽁뽁이를 붙였다.

따뜻한 태국에서 온 그녀가 추운 이곳에서 불편하지 않도록....


아침이 늦자 모로가 신경질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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