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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Dec 04. 2022

만물에 깃든 하나

2017. 12. 17

2017. 12. 17. (BY 아이 잃은 부모, IN 제주도)

지난주 12월 9일 라오의 장례를 치렀다.

“만물에 깃든 하나만을 보라. 그대를 헤매게 하는 것은 두 번째니라.”라고 말한 카비르의 글이 떠올랐다.


그동안 우린 만물에 깃든 하나를 놓치고, 헤매며 지낸 셈이었다.  

라오가 죽던 날부터 오늘까지 계속해서 바람과 눈비가 오고 있다.

70년 만에 처음으로 한강이 얼었다.

우리 집 뒤뜰에 받아둔 빗물도 얼어붙어 아침에 얼음을 깨고 물을 길었다. (제주도에선 이상한 일)

바람이 채찍 같았다.


라오를 공격한 병원균은 파보였다. 이틀 만에 제대로 손쓰지도 못하고 죽어버렸다.


사진을 찾다 보니 라오 독사진이 없다는 걸 알았다.  오른쪽이 라오.


너무 마음이 아프다. 이런 마음은 평생 갈 것 같다.

얼마나 목이 탔으면 물그릇에 얼굴을 묻고 죽었을까?


모로와 라네는 멀쩡해서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이내 커다란 파도가 뒤를 덮쳐 깊은 바닷속 모래에 파묻히는 느낌에 압도당했다.


라오가 죽었다.

서로에 대한 쓸데없는 감정, 제주를 떠나야 한다는 쓸데없는 계획 따위에 정신이 팔려서 정말 중요한 걸 놓친 셈이다. 아내와 재회하기 며칠 전부터 좀 놀아보겠다고 애들 돌보는 걸 소홀히 했다.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미래가 제일 중요하다 생각했다.  이런 지역 속담이 있다.

"도대체 뭐가 중요한데?"


제주 출도 계획은 너무 깊은 슬픔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잃기 전에는 모를 때가 많다.

그런 걸 미리 대비하고 마음에서 잃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상상력 외엔 없는 것 같다.

상상을 하는 거다.


주위에 사람들, 모든 물건들을 바라보며 만약 그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는 힘.

그런데 그걸 상상할 수 있다면 죽음도 상상할 수 있는 법이다.

만약 내가 죽음 직전에 있다면 신과 만나서 무엇을 얘기하고 내 삶에 무엇을 되돌아볼지 상상해 보는 거다.


하지만 글렀다.

그동안 나의 상상력에 의심을 한 적이 없었다.  이미 사선 근처에서 몇 번의 경험을 했었기에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라오의 이불을 빨고, 라오가 밥그릇을 비운 뒤 웃으며 날 쳐다보던 등등의 추억이 날 무너뜨리고 있다.


추억은 늘 위안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라오야.....

라네를 볼 때마다 네 모습이 떠오른단다. 

아주 오래.... 괴롭겠지?

라오야, 미안하다.   



2017. 12. 21. (BY 아이 잃은 부모, IN 제주도)

“잠깐만요. 내가 원하는 민원은 그게 아니잖아요. 카카오 뱅크가 먼저 되는지 안되는지부터 알아봐 주셔야 하잖아요. 그게 일하는 순서잖아요!..... 나 참! 어이가 없네!”


아내는 전화를 끊고 이렇게 내뱉었다.

“무식한 새끼”


나는 지금 그녀 맞은편에 앉아 그녀가 눈에 거슬리는 업자를 상대하는 모습을 벌벌 떨며 지켜보고 있다.

나는 나의 삶이 이제 눈에 거슬린다.


라오 없는 자리가 아프다.



분명 변하고 있는데,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아직도 사선에 있다.

수평의 선에서 편히 앉아 서로 마주 보거나, 인정하는 사이가 아니다.

그런데 오르막의 사선인지, 내리막의 사선인지 모르겠다. 어느 날은 내리막으로 치닫고 어느 날은 오르막에서 서로 뒤엉킨다.


이제 우리 모두 자기를 버리고 만물에 깃든 하나에서 만나길 바란다.

그곳은 라오가 있는 곳이 아니라 모로와 라네가  있는 이곳이다. 내가 아니라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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