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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쿠쌤 Jul 31. 2021

언제까지 집에서 놀 거야?

노는 인간의 시대와 전업맘의 자존감

노는 인간의 시대.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잘 노는 인간'이 필요하다고 콕 집어 이야기하기도 한다. 혹자는 논다는 것과 쉰다는 것이 다르다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쉰다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것이지만, 노는 것은 좀 더 적극적으로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실행하는 것이란다. (출처: 오마이뉴스 편성준 작가 인터뷰 중) 꽤 설득력 있다. 노는 인간의 시대라! 어쩌면 AI가 인간이 할 일을 속속 대체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살펴보면 이미 우리는 그 시대에 생각보다 깊이 편입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집에서 노는 것이 불편한 이유

개인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공간이어야 할 집, 그 집에서 편히 논다는 데 왜 불편하냐고? 게다가 요즘과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는 집이 가장 안전한 공간일 텐데 말이다. 어쩌면 이 시국 덕분에 내가 집에 있는 명분이 더 생기는 것 같아 고마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 난 육아하는 전업맘이자 경단녀(경력단절 여성)이다. (경단녀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좋지만은 않아 잘 쓰려고 하지 않지만, 이미 사회적인 용어로 널리 쓰이니 써봤다) 소위 말하는 80년대생 알파걸로 자라온 내가 '전업주부'가 되었을 때의 상실감은 어마어마했더랬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전업맘'이라는 내 타이틀이 완전히 편하지는 않다.



"언제까지 집에서 놀 거야? 아깝다."

잘 나가는 워킹맘인 지인의 비수를 꽂는 말. '논다'라는 동사가 이렇게 무거운 단어였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논다고? 내가 노는 걸로 보이니? 집에서 살림하고 애들 둘 건사하는 게 쉬운 줄 아니? 자기 계발을 위해 독서도, 영어공부도, 건강관리도 꾸준히 하고 있다고!!!' 란 마음의 소리가 끝이 없이 이어졌지만, 웃으며 넘겼다. 집에서 온전히 살림하고 육아해 본 일이 없는 그녀가 내 상황을 알아주고 공감해줄 리 없겠지. 나도 평생을 워킹맘으로 살아왔다면 당연히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고 별뜻 없이 저런 말을 내뱉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내가 회사를 안 다니는 것이 아깝고 안타까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우쭐대는 비아냥인지 그것도 아니면 복잡 미묘한 감정의 뭉치인지 모를 그녀의 관심이 껄끄럽고 불편했다.


학창 시절 가정조사 설문지에 꼭 등장하는 내용 중 하나. 부모님의 직업이었다. 친정엄마는 평생을 '가정주부'로 살아오셨고 엄마는 딸들만은 하고 싶은 일을 멋지게 하고 살길 바라셨다. 게다가 남녀차별이 점차 사라지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지는 시대이니 나도 차별 없이 똑같이 공부하고 인정받고 취직하고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러다가 결혼과 육아라는 복병을 만나 결국에는 퇴사를 선택했다. 결혼과 육아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고 제대로 알았으면 덜 당황스러웠을 것 같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사전 지식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게 내 불찰이지 싶다. 아무튼 퇴사 후 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육아'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보자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돈을 벌지 않는다--> 생산적이지 않다--> 난 생산성이 없는 사회 구성원이다

위와 같은 잘못된 생각이 이상한 논리와 사회통념과 육아 스트레스와 결합되면서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돕고 케어하는 역할은 그저 전통적인 여성상이며 그다지 생산적이지 못하다'라는 현대사회의 통념 속에서 교육받고 그렇게 믿고 지금껏 자라왔다. 그래서일까? 어린 시절부터 난 당연히 워킹맘이 되어 멋지게 커리어를 쌓으며 살게 될 줄 알았다. 친정엄마의 무조건적인 헌신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인생은 늘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


나와 비슷한 또래의 육아맘들이 겪는 자존감의 문제를 나도 겪었다. 아니, 겪고 있다. 개인의 문제가 일반적인 현상이 될 때 사회문제로 규정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어쩌면 사회적인 문제인 듯하다.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상, 일반적으로 여성이 출산과 육아에 여성이 더 많이 가담하게 될 수밖에 없는데 동시에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하는 것은 참으로 고된 일이기 때문이다. 육아도우미를 고용하거나 또는 조부모님 육아 찬스를 쓰는 워킹맘들도 가정과 일 사이에 외줄 타기 하는 기분이라고 한다. 결국 대한민국의 모든 엄마들이 고군분투 중인 것이다. 이 글에서 거창하게 여성의 사회진출을 위한 정책에 대해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좀 더 많은 여성들이 일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인 장치와 제도가 점차, 아니 좀 더 속도를 내어 갖춰지길 바라는 바다. 오죽하면 반페미니즘의 선봉자로 2030 남성들의 지지를 받는 조던 피터슨 토론토대 교수도 대한민국의 저출산과 관련하여는 "어머니와 아이를 숭배하지 않는 문화는 멸망하지요."라고 했을까. 여성이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장려하는 문화가 필요하다면서 말이다. (출처: [필동 정담] 피터슨도 놀란 韓 출산율/ 매일경제신문/2021.06.21)



프로 와이프, 프로 엄마가 되기로 작정하다

첫 아이를 낳고도 번역일, 영어 강의 출강 등을 지속해왔다. 다행히 세상 스위트 한 남편은 한 번도 일에 대해서 강요하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 혼자 못 견뎌서, 뭐라도 해야겠어서 부단히 애썼다. 그렇지만, 노력 대비 보수나 보람이 낮았고 아이와 아이를 봐주신 부모님한테 자꾸 미안해지기 일쑤였다. 거기에 둘째 임신이 되고 남편까지 지방으로 잠시 가야 했으니 내가 따라와서 전업맘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현실 인정과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찾는 것이 빠르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와 엄마인 가정에서의 나를 골똘히 살펴봤다. 경제적 가치 이상의, 지금밖에 할 수 없는 고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먼저 했던 사람들의 책을 읽었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나를 위한 시간을 썼다. 싱글 시절의 나 혹은 워킹맘인 사람들과의 비교는 무의미했고 지금의 나를 인정하니 할 수 있는 것들이 조금씩 보이고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 생활을 시작한 후에는 운동할 시간, 책 읽을 시간 살림에 더 신경 쓸 시간이 확보가 되었다. 혹자는 집에서 논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황금 같은 시간은 때가 되면 디딤돌이 될 것이라 굳게 믿으며 하루하루를 충만히 살려고 노력했다.


우선순위를 아는 프로 아내, 프로 엄마



그래서, 언제까지 집에서 놀 건가요?

이런 질문, 앞으로도 종종 받을 것 같다. 정확히 대답을 하자면 지금도 집에서 놀지 않는다. 앞서 말한 '엄마의 자존감 문제'? 아직 100% 는 아니지만 익숙하고 편안해지고 있다. 코로나가 불러온 SNS와 온라인 시장의 확대로 나와 같은 전업맘들이 할 수 있고 연결될 수 있는 일들이 꽤 많아졌다. 그래서 브런치에 글도 쓰고 인스타그램으로 커뮤니티에 참여도 하고 유튜브도 하고 영어 스터디도 운영하게 되었다. 적어놓고 보니 꽤 벌인 일이 많다. (브런치 작가, 헬로쿠쌤을 소개합니다'를 참고하시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때 뭘 하는지가 그 사람을 규정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격하게 공감하는 바다. 내가 좋아하고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하며 때를 기다리는 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다. 더욱이 요즘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서 온라인 커뮤니티로 연대를 유지할 수 있으니 그 또한 정말 감사할 일이다. 내 우선순위이자 본업을 잊지 말자. 나는 프로 아내이자 프로 엄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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