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인생에서 후회되는 순간이 있나요?
때는 바야흐로 약 10년 전. 첫 직장 퇴사 후, 호주 유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나는 다시 국내 취업시장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퇴사 후 유학을 떠난 이야기는, '멀쩡히 다니던 대기업 퇴사 이유와 유학 결심' 글을 참조하시길)
계속 호주에 머물거나 싱가포르 등지에서 일을 하고 싶었던 처음의 당찬 포부와는 다르게, 유학 후에는 한국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쩌면 외로운 유학생활 후에 가족이, 나라가 그리웠던 시간이었으리라. 더욱이, 무엇이든 지금보다는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던 나의 20대 시절이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해외로 갈 수 있겠지'라는 생각도 컸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니, 그게 아니더라. 그때 도전했어야...)
늦게나마 외국물(?)까지 먹으며 가방끈 길게 만들어 다시 돌아온 터라, 일하고 싶은 회사를 찾고 포지션을 고르는 내 눈높이가 좀 높아졌다. 기업 입장에서도 좀 더 신중하게 채용을 진행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내 상황이 좀 어중간했다. 호주로 유학을 가기 전, 고작 만 2년의 회사 생활이 전부여서 딱히 내세울만한 경력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 신입사원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자신만만하게 취업시장에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한 외국계 기업 CS(고객관리) 포지션으로 인터뷰가 잡혔다. 집에서도 멀지 않은, 내가 늘 근무하고 싶은 여의도에 위치한 꽤 괜찮은 다국적 회사였다. (나의 유별난 여의도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여의도 빌딩 숲에 가면 가슴이 뛴다'를 참조하시길) 참고로 이 회사는 현재 강남으로 이전했고 아직도 잘 업계 1위를 지키며 잘 나가고 있다.
면접은 매우 순조로웠다. 한국 지사의 임원 1명과 실무진 1명이 면접관으로 있었는데, 내 이력과 스토리에 흥미를 보이며 유쾌하게 인터뷰를 이어갔다. 좋은 시그널이다. 왠지 잘 될 것 같은 기대를 하며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 날 면접관에게 연락이 왔다. 나를 보고 본인의 주니어 시절이 생각났다면서, 내가 지원한 포지션보다 더 적합한 해외 포지션을 추천한다고 했다. 싱가포르에 있는 글로벌 본부에서 일하는 것에 관심 있냐면서 지원서와 추천서를 내주겠단다. 알고 보니 그 실무진 면접관(여자)도 싱가포르 본부에서 약 5년간 근무하고 나서 한국으로 더 좋은 조건으로 전근했다고 한다. 그때의 경험이 매우 소중했으며 나 정도 실력과 경력이면 싱가포르에서 충분히 더 좋은 커리어를 쌓고 다시 한국으로 올 수 있을 거라는 말까지 했다. '이게 뭐지?'라는 생각과 함께 처음엔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고 나를 잘 봐준 거니 기쁘기도 했다. 한때 싱가포르에 위치한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제 발로 기회가 찾아와 준 건가 싶기도 하고, 자연스레 한국에 있는 포지션은 합격 취소가 될 것이니 아깝기도 했다. 아무튼 특별한 기회가 온 것임은 확실했다.
그 기업의 글로벌 본부와의 전화 인터뷰는 총 두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인터뷰 날짜도 속전속결로 잡혔다. 뭘 준비해야 하나. 일단 굳어져버린 듯한 느낌의 혀에 기름칠을 듬뿍. 영어는 수단에 불과하지만 대면이 아닌 전화로 인터뷰를 해야 하니 어리바리하면 안 되겠다 싶어 인터뷰 연습도 해보고 무엇보다 마음의 준비도 했다. 지금에야 비대면 온라인 인터뷰가 대세가 되고 있지만 그땐 해외 취업할 땐 전화 인터뷰가 필수였고 어떤 경우에는 해외 현지에 가서 직접 인터뷰를 보고 오기도 했다. 아 옛날이여.
면접관은 인도식 악센트가 살짝 묻어나는 하이톤의 노련한 사람이었다. 총 2번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내가 미리 제출한 (실제로는 국내 지사에서 토스해준) 내 이력서를 보며 질문을 했고, 크게 무리되는 점은 없었다. 2차 인터뷰는 좀 더 캐주얼한 분위기였다. 아시아를 휩쓴 한류 열풍과 김연아 선수에 대한 이야기도 인터뷰에 등장했다. 그 당시 한류는 말할 것도 없고,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에서 선전해준 덕에 싱가포르에까지 김연아 신드롬이 있었나 보다. 내가 지원서에 적은 취미 'yoga'를 보며, 회사에 요가클럽이 있다며 나중에 오게 되면 같이 하자고 무척 반가워하기도 했다. (역시 예측한 대로 인도계가 맞았음)
'안되면 그만이지'라는 마음가짐 때문이었는지 부담 없이 임한 전화 인터뷰였다. 그래서일까? 인터뷰가 끝난 다음날 오퍼가 왔다.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원활한 취업 비자 수속을 위해 서둘러 달라는 노트와 외국인이기에 한 달간 무료 숙박을 제공한다는 공지도 있었다. 이제 내 결정만 남아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꿈 많고 호기심 많은 딸아이의 선택을 존중해 주셨다. 이때 아니면 언제 그런 일을 해보냐며 응원까지 가득 담아서. 그러나 하필 그때, 인터뷰를 본 다른 회사에서 합격 전화를 받았다. 갈등의 시작. 결국 국내에 위치한 회사를 택했다. 마음의 준비가 더 되면 그때 다시 해외 취업에 도전하리라 애써 위로하면서. 인생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동시에 합격한 상황만 아니었어도 난 싱가포르에 갔을 것 같다. 단 일주일의 텀만 있었더라도 말이다. 부모님과 가족들은 국내에서 일하겠다는 내 결정에 내심 기뻐하셨다. 하긴, 혼기가 다가오는 과년한 딸아이가 꿈을 찾아 타국만리로 다시 가버린다는데 반가워할 부모는 없을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얼마 뒤 난 지금의 남편과 연애를 시작했다. 그 유명한 교회오빠 아니, 교회동생이랑. (교회오빠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그 멋진 교회오빠는 다 어디로 간 걸까?'를 참고하시길)
그리고 내 해외 취업은 갈수록 요원해져 버렸다. 지금도 가끔 그 회사 옆을 지난다. 그때마다 남편에게 하는 말.
나: 저 회사에 갔으면, 싱가포르에 갔으면 어땠을까? 거기서 왕서방을 만났을까?
남편: 나를 만났겠지. 돌아 돌아 어떻게든.
나: 그래, 맞아.
남편의 재치 있지만 확고한 대답에 피식 웃음이 난다. 내가 선택했던 순간들의 합이 나를 이 자리로 데려왔겠지만 지금 행복하면 그만 아닌가. 단지, 20대 열정 부자 시절의 내가 가끔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