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서울에서 차로 2시간 이상 달려 내려온 곳에서 맞은 겨울은 무척 매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처럼 큰 빌딩이 많지 않아 바람은 사방 군 데서 불어대고 실내에서 이동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겨울날 아침이면 자동차 앞유리에 하얗고 곱게 낀 성애를 박박 긁어대는 일이 일상이었다.
우리 가족만 낯선 곳에 뚝 떨어진 느낌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마음이 추웠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게다가 그해 겨울, 유난히도 눈이 잦았다. 옥천으로 이사 온 것은 가을이지만, 나에겐 겨울부터 기억이 난다. 가을은 온통 적응하느라 정신없던 날들이었음에.
섬길 교회를 찾다
우선 섬길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아는 서울 목사님께 추천을 받은 교회 중 한 군데에 등록하게 되었고 우리는 감사하게도 2년 반 동안 아이들과 감사하게 다닐 수 있었다. 막판에는 집사 직분까지 주셔서 덥석 받기도... 옥천에서 유명한 정지용 생가 근처에 있는 교회인데,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그 옛날에 선교사가 와서 개척했을 때 얼마나 노고가 컸을까 생각하니 울컥하기도 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교회 밥이 정말 맛있었다. 식재료는 마트 대신 교회 성도들의 밭에서 가져온 것들도 많아서 싱싱하고 맛깔스러웠고 솜씨 좋은 주방 봉사자분들의 손맛이 더해져 늘 근사한 한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아기띠를 해야 밥을 먹어야 했지만 누군가의 정성을 받는 기분은 포근했다.
2년반 동안 감사히 다닌 교회 유치부 예배
어린이집에 온 가족이 총출동하다
그 당시 내가 혼자 육아를 해본 적이 몇 날이나 되었을까? 친정의 도움으로 아이를 키워봐서 육아에 대한 열정만 있었다. 그러다가 독박 육아가 시작되었다. ('독박'이란 단어가 주는 어감이 아직도 별로 좋지 않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부르기로 하겠다) 둘째는 내가 보더라도, 20개월 위의 첫째를 기관에 맡기는 것이 시급했다. 어찌어찌 어린이집을 찾았는데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원에서 차량 운행을 해준다지만, 첫날부터 23개월 아이를 노란 버스에 태우는 것은 안될 일. 우리 집 승용차는 남편의 출퇴근에 써야 했고. 고민한 끝에 결국 우리 가족 모두 아빠 출근 시간에 어린이집에 출동하기로 했다.
둘째는 100일이 채 안되었었다. '백효정 아기띠'라는 당시 육아계의 핫한 아이템으로 목도 제대로 못 가누는 아기를 칭칭 동여매어 안았다. 어린이집 선생님들께는 희한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이사 온 뉴페이스, 온 가족이 이른 아침 어린이집에 등원하는 모습이 말이다. 참고로 옥천은 참 작은 곳이라 뉴페이스가 굉장히 눈에 잘 띈다. 텃세도 심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에 대한 에피소드는 나중에 풀어보겠다.
다행히 큰 아이는 어린이집에 빨리 적응했고 칼퇴근을 하는 남편 덕분에 같이 육아하고 살림하며 차차 옥천 생활에 적응해갔다.
옥천에서 처음맞은 어느 봄 날에
시골에 마트가 있을까?
이런 황당한 질문이 있을까. 그러나 서울촌놈이었던 나는 대형마트나 인터넷 장보기에 익숙했고, 지방 작은 동네에서 어디서 장을 보나 하는 걱정부터 앞섰다. 실제로 옥천에는 아직도 5일장이 있다. 장터 구경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지만 정작 아이들이랑 외출이 번거로워 몇 번 가보진 못했다.
그러나 옥천에는 중형급의 로컬 마트들이 꽤 잘되어 있는 곳이었고, 여차하면 가까운 대전의 대형마트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집 근처에 꽤 괜찮은 마트가 있었고 산지에서 바로 재배한 싱싱한 과일과 채소를 먹는 재미도 누렸다. (참고로 옥천의 포도와 복숭아는 자부심 가질 만큼 맛도 품질도 우수하다. 여름에는 '포도 복숭아축제'를 열기도)
동네 적응기
몇 가지 급한 일을 처리하니 그제야 내가 거주하는 동네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있던 옥천읍은 약 5만 명의 옥천 인구가 대부분 몰려있는 곳으로 아파트도 꽤 많았고 생각보다 카페도 많았다. 우리 아파트 바로 옆엔 초등학교가 위치해 있었고 시내 혹은 읍내도 가까워서 당시엔 살기 좋은 곳으로 꼽혔다. 접근성도 좋아서 약 2킬로만 나가면 바로 경부고속도로였다. (지방에 살면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다. 특히 서울을 그리워했던 나 같은 사람에겐) 지금도 읍의 리 단위에 살았던 예전 주소를 보면 적응이 안된다. 거주하던 동네가 딱히 시골스러운 느낌이 아니라서 더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긴, '시골살이'라고 하면 의례 떠오르는 전원주택과 논과 밭 풍경은 내 이야기엔 별로 등장하진 않으니까. 그렇지만 차로 잠시만 나가면 마음껏 자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지금도 때때로 그런 자연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