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가 만드는 다정함의 기록
우연의 일치 하나. 내가 사는 곳은 우리 할머니의 고향이다. 할머니는 시집가기 전까지 유년 시절을 이 지역에서 보냈다. 당시 할머니네 집은 큰 부자였다. 고조할아버지가 지역에 유일하게 있었던 버스 회사를 운영했다. 나도 어릴 적에 할머니네 옛 집에 가본 적이 있는데, 대문 옆에 일하는 분들이 머무는 건물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어린 할머니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건 경제적인 풍요가 아니라 고조할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이었던 것 같다. 고조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무려 그 시절부터 유치원도 보내고, 땅도 못 밟게 매번 업고 다니셨다. 또 인근 대도시에 나갈 때면 꼭 새옷을 사 와 딸에게 입히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사랑 덕분에 할머니의 세상은 무척이나 포근하고 따뜻했을 것이다. 그 이후 생활과 비교하면 더더욱.
할머니는 이후, 도시에 사는 가난한 집 장남에게 시집을 갔다. 고된 시집살이를 하며 처음으로 농사도 지었다. 바로 우리 할아버지 집에서 말이다. 남편감이 학교 선생이라는 이유로 집안 어른들끼리 맺어준 혼사였다. 예고 없이 떨어진 어려움 앞에서, 할머니는 고향에서의 생활을 이상향으로 남겨뒀을 테다. 그래선지 유년 시절을 말하는 할머니는 언제고 꿈꾸는 듯 온화한 얼굴이 되곤 했다.
할머니의 따스한 눈빛을 다시 보게 된 건, 이사를 하고 얼마 안 있어서였다. 할머니께 어디로 이사했다고 말씀드리니 대번에 행복한 미소를 띠었다. "거기 사람들이 참 온순하지야? 다들 친절하고. 원래 시골 사람들이 참 순박해." 할머니와 백 분 토론을 할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물음표가 계속 떠 있었다. 꼭 이 지역에 대한 이야긴 아니지만 이사하기 전부터 시골 살이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은 뒤였다. 그러니까, 젊은 사람이 시골에 가서 살면 각종 텃세에 시달린다는 이야기. 아니면 마을 행사에 계속 동원될 거라는, 별로 친절한 느낌은 아닌 이야기들 말이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편견에 가까운 추측일 뿐이다. 게다가 이전 스스로의 글에선 출생지나 거주지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고 주장까지 한 터였다. 그래서 이후에는 거주지에 따라 하는 판단을 최대한 보류하고,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사 온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그간의 관찰 일지를 발표해본다. 일단 시골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보다 평균적으로 서로에게 친절하다. 그런데 그건 여러 요인들이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먼저 시골은 인구 연령대가 높다. 어딜 가나 나이 많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보다 주변에 말도 잘 걸고 잘 챙기는 경향이 있다. 왜, 지하철 노약자석에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정답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그간의 인생 경험들 덕분에 낯선 이와도 쉽게 대화 주제를 찾는 것 같다. 또 설령 상대가 대화 중 기분 나빠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수 있는, 일종의 담대함도 노인들에게는 있는 것 같다.
또 자주 보는 이들에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친절해진다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규모가 작은 지역에서는 대부분 서로 알고 지내고 자주 마주친다. 편의 시설이 읍에 모여 있어 생활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 곧 자기 삶의 질과도 연결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되도록 웃는 낯으로 서로를 대한다. 우리 가족이 품앗이를 해야하는, 농업에 종사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과 밀접한 교류를 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도 불친절을 못 느끼는 요인일 수 있겠다.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꼭 시골 사람이어서 무조건 순박하다기보다는 이곳의 사회적인 특성 때문에, 서로에게 각자의 방식대로 친절할 수밖에 없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개인적으로는 요즘이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친절을 받고 있는 시기이다. 이건 아마 아이들 덕분인 것 같은데, 만 3살짜리와 1살짜리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어딜 가나 사람들이 온화하게 쳐다봐준다.
"아휴, 아기들이 참 예쁘네~"
"귀한 아기들 오시네~"
이런 말씀들을 대놓고 해주신다. 아이들이 계단이라도 느리게 내려가면 다들 뒤에서 웃으며 기다려주고, 아이들이 천천히 걸어가면 슬쩍 웃으며 길을 비켜주신다. 그래서 온 가족이 어딘가 갈 때면 마치 VIP 라도 된 듯 느껴지기도 한다. 서울 친정집에 갔을 때는 아예 모르시는 분이 아이들 유아차를 같이 끌어주시겠다고 한 적도 있다. 날도 더운데 애기 엄마가 너무 힘들어 보인다는 이유였다. 물론 그때 진짜 엄청나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런 말씀들 덕분에 잠깐 힘이 나서 열심히 걸어갔다. 아무튼 요즘 나는 주변에 친절이 넘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게 시골에서 사는 덕분인지, 애들이랑 사는 덕분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친절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려면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스스로 고민이 많고 치열할 때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주변에 마음을 쓰는 것도 좀 더 어려웠다. 요즘은 일을 쉬고, 아이들이 마냥 귀여운 시기이기 때문인지 주변이 좀 보인다. 그리고 사람들의 친절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다.
최근에는 몇 년간 연락을 안 했던 친구가 생일이라고 메신저에 뜨길래 따로 안부와 축하를 전한 적도 있다. 이사를 한 친구에게는 따로 선물을 보내고 말이다. 이렇게 이런저런 지인들을 챙겼더니 하루는 '아이를 낳으면 다 너그러워지냐, 아니면 시골에 가서 여유가 생겼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순간 그에게 평소에 내가 그렇게까지 냉철하게 굴었나 싶었지만, 마음속 여유 공간에 의아함을 밀어 넣고 그저 사람 좋게 웃어주었다.
"글쎄..? 하하하"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과한 친절로 포장된 오지랖까지 다 포용할 수는 없다. 친근하게 다가온 사람 중에는 내 외모나 체형에 대해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고, 우리 육아 방식에 대해 세세하게 간섭하는 사람도 있었다. 더 이어질 관계였다면 그때는 친절이고 뭐고 대번에 화를 냈겠지만, 대부분 그저 지나가는 관계라 그냥 잠시 웃어넘겼다. 정말 웃겨서 웃는 게 아닌 만큼 공기를 들이마실 때 약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물리적인 거긴 하지만 이 때도 몸속에 여유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 같다.
여유를 가지고 나니 새삼 주변의 다정함과 친절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수 있어 좋다. 그리고 그 마음들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된다.
시골 사람은 친절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히, 여유가 있는 사람은 친절하다! 할머니의 온화한 눈빛도, 결국 고조할아버지의 큰 사랑 안에서 생긴 것일 테니 말이다. 친절, 여유, 다정함에 대해 생각하다 나도 좀 더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스쳐 지나가며 베푼 친절이 누군가의 하루를 환하게 밝히고 오래 머문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행복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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