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안정감의 맛
"잘 다녀와!"
"엄마, 안녕!"
현관문이 닫히고 고요한 순간이 찾아온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갔다. 집을 돌아보며 장난감 등을 정리하고는 할 일을 생각한다. 운동, 장보기, 그리고 청소 또는 빨래. 가방을 챙겨 문을 나서면 대략 8시 45분. 집에는 점심쯤에나 도착할 것이다. 육아 휴직의 하루는 이렇게, 거의 비슷하게 정해진 루틴대로 굴러간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야, 좋겠다. 육아휴직 할 만하네!"
부정할 수 없이 좋다. 운동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고, 나만의 속도로 집을 정돈하거나 요리하는 것도 여유롭다. 집안일이 쉬운 건 아니지만 보람 있다. 내가 몸을 좀 더 부지런하게 움직일수록 아이들 표정이 환해진다. 밥이 맛있다고 하고 포근한 이불에서 뒹굴거린다. 출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류의 기쁨이요, 육아와 휴직을 하고 나서야 온전히 느끼는 행복이다.
하지만 마음까지 마냥 평온한 건 아니다. 30대 중반, 다른 미혼 친구들이나 일찍 회사에 복귀한 친구들은 한창 사회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다. 회사가 자신을 얼마나 갈아내고 있는지, 동료는 얼마나 염치가 없는지- 이전에는 감흥 없이 듣던 친구들의 푸념도 부러울 때가 있다. 잠시 투덜대던 친구들이 이내 큰 프로젝트를 맡고 대학원을 가며 또 다른 성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아직도 종종 혼자 도태되는 느낌이 든다. 또 회사에 복직하더라도 지금 열심히 달리는 친구들과 동료들을 따라가기는 버겁겠다는 생각을 한다. 섣부른 걱정이 아닐 거다. 연봉, 직책, 자격... 친구들은 여러 단어들로 앞서갔고 나는 멈췄다. 그들의 속도에 감탄과 초조를 함께 느꼈다. 누군가는 출산과 육아도 인생에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다 때가 있는 거니까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라고 위로했다. 그래도 뒤쳐진 부분에 대해 자꾸 마음이 머무는 건 어쩔 수 없다.
특히 육아휴직 초기에 나는, 불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 무언가를 배우려고 노력했었다. 괜히 포토샵도 공부하고 관련 자격증도 땄다. 포토샵과 일러스트 자격증을 연달아 따고 나서, 다른 하나를 더 따려고 했는데 문득 이런 자격증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그만뒀다.
물론 자격증은 핑계고 그동안 엄두도 못 냈던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장기적인 비전 없이, 불안감에 내몰려 자기 계발을 하고 나니 늘 그렇듯이 허무했다. 자격증을 따고 그 기술을 써먹지 않아선지 1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관련 프로그램을 운용하는지도 벌써 희미해졌다.
그 뒤로 선택한 취미가 체력 단련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수영을 주축으로 한 운동이다. 사실 수영을 열심히 하는 것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불안감과 맥이 닿아있다. 운동을 할 때는 힘들어서 아무 생각이 안 들기 때문이다. 오직 이상적인 자세와 호흡에만 신경 쓰는 순간, 그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걸 참아내다 보면 어느새 목표한 운동량이 끝난다. 운동 후에 적당한 근육통을 느끼며 하는 샤워가 얼마나 시원한지 모른다.
운동하고 나면 저녁에 잠도 잘 오는데 그것도 좋다. 쓸데없는 걱정은 주로 새벽에 드는데 아예 그 시간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몸을 성실하게 움직이는 일만큼 마음을 잠재우는 일이 없다. 그래서 마치 운동선수처럼 악착같이 아침부터 몸을 움직였고, 체력이 더 남으면 오후에 한번 더 수영장에 가기도 했다. 몸이 피곤해야만 마음이 놓이던 때였다.
물론 운동을 하면서도 문득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품었다. '나는 뭐 하는 사람일까? 육아와 집안일이 없는 나는 이제 어떤 사람일까?' 대학을 잘 가야 하고 그다음은 취업을 잘해야 하는 삶 속에서 목표는 오직 '사회적인 나의 발전' 뿐이었는데 출산 후에는 뚜렷한 목표가 사라졌다.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 사람인지, 학교나 직장 간판 없는 나는 어떤 사람인지 수십 년 동안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운동을 하고 거친 숨이 잠잠해지면 좀 더 평온한 마음으로 현재의 나를 생각했던 것 같다. 의외로 사랑했던 내 커리어와 예상외로 좋았던 육아의 어떤 면, 또 이미 알고 있었던 나의 취향들을 확인하며 숨을 골랐다.
운동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서였을까. 어느순간부터 컨디션과 생각의 결이 함께 가는 것처럼 느꼈다. 힘들게 운동하며 한 고민이 샤워하면서 씻겨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체력이 좋아지면서 마음 속에 있던 고민들도 점점 다루기 쉬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회복 탄력성이 좋아지는 건 비단 감정적인 변화만은 아니었다. 실제 숨이 가쁘고 힘든 순간도 버티기 수월해지는 걸 느낀 것이다. 숨이 찰 만큼 힘든 일, 예를 들어 한창 활동량이 많은 영유아들을 쫓아다니고 집안일을 해도 금방 평온한 상태로 돌아오는 걸 느꼈다. 사실 난 스스로가 극한으로 몰릴 때 얼마나 예민하고 감정이 쉽게 폭발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평온한 상태로 빠르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아이들에게 대부분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일 수 있는 것, 그리고 미래에 대해 차분히 고민해 볼 수 있는 것도 호흡이 금방 안정되는 체력 덕분인 걸 알게 됐다.
시키지 않아도 꾸준히 하고 있는 일을 분석하면 스스로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수영, 헬스 같은 운동을 하고 장을 본 다음 빨래를 하거나 청소를 한다. 한계를 깨는 것, 두려워도 나아가는 것에 대해 꽤 큰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낀다. 가족이 모든 결정의 기준이 되며 우선 가치이다. 무슨 일이든 재미를 느끼면 여러 번 성실하게 반복한다. 의무 없이도 성실히 해내는 일들이 나를 우울감 밖으로, 수면 밖으로 꺼낸다. 이렇게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할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인지 조금씩 알게 된다.
루틴대로 살면 노력을 적게 해도 삶이 일정한 방향으로 흐른다. 설령 마음이 요동쳐도 몸은 그동안 가던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는 동안에도 방황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게 바로 성실의 맛, 잠깐 머뭇거려도 멈추지는 않는 안정감의 맛일 것이다. 더 건강한 내가 되고 있다는 자신감- 그 심심하면서 자극적인 행복이 오늘도 나를 장 보게 한다. 운동 가방 챙기고 청소와 빨래를 하게 한다. 단단한 마음으로 하루를 지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