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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Nov 01. 2020

에필로그_내가 사는 마을, 평촌

돼지를 부탁해

부모님에게 채식 선포를 하던 날이다. 출가한 아들이 오랜만에 집을 방문한 날이었고, 우린 외식을 앞두고 있었다. 돼지갈비로 할지, 갈비탕으로 할지 메뉴에 대한 을박이 오고 갔다. 흥분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던 차의 채식 선포는, 메뉴를 콩나물국밥으로 장마감시켰다. 고기 없이 밥 못 먹는 형은 나락으로 떨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둘째의 채식을 부모님은 ‘가난'으로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6년이 흘렀지만, 이후의 대화는 모두 ‘너는 가난해서’식의 핀잔으로 끝맺었다. 내 부모님 시대의 구원은 가족 입에 고기 한점 더 넣어주는 것이었다. 존경하는 나의 부모님은 사랑하는 손주가 오는 날엔 고기를 사놓으셨다. 


먹방의 시대. 고기의 식감에 대해, 육즙에 대해 우리는 말한다. 단백질 보충이라거나, 힐링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고기도 한때는 숨을 쉬는 생명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처럼 감정이 있고, 생각이 있고, 따뜻한 피가 흘렀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죽어서 우리에게 오는지, 우린 말하지 않는다. 매년 가축전염병이 돌고, 축종별로 돌아가며 수많은 동물이 땅에 묻힐 때, 우리는 비로소 가축의 존재를 본다. 


이 갑작스러운 동물 전염병을, 너무 급작스런 만남을 우리는 ‘먹방의 이면’으로 연결 짓지 못한다. 미디어는 가축전염병이 인간에게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고기 가격이 오를 것인지, 떨어질 것인지에 대해 조망할 뿐이다. 철새에게, 멧돼지에게, 외국인 노동자에게 책임을 돌릴 뿐이다. 가축은 우리 사회의 이면이고,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자성의 기회를 놓치고, 가축전염병은 반복된다. 전염병이 아니더라도 동물은 이순간에도 죽고 있다. 먹방 대상으로 죽을지, 방역 대상으로 죽을지 다를 뿐이다. 공장식 사육이 최악의 동물 학대라는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공장식 사육은 동물권이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축을 땅에 묻을 때마다 주어지는 인간성 회복의 기회를 우리는 놓치고 있다. 생명에 대한 감각을 잃은 것, 그 자체로 우리는 이미 벌을 받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자연양돈 돼지를 만나고도, 마음 한켠은 어쩐지 불편했다. 돼지도 죽는 순간 울부짖었다. 생명을 먹는 일을 마주해보고 싶었다. 돼지 삼남매는 매일 마주하는 눈앞의 질문이었다. 높고 낮음 없이 평등한 관계가 평화平和라고 배웠다. 돼지를 기르고 잡아먹으며, 평등에 대해 생각했다. 단순히 먹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를 넘어, 서로가 고귀해질 수 있다면, 돼지도 살아 있는 동안 존중받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가축과 인간이 지난 수천년간 그래왔듯이 말이다.


도시의 빛은 점점 커지고 있고, 그 그림자는 꾸준히 농촌으로 이전 중이다. 송전탑, 쓰레기소각장, 채석장, 석탄과 핵 발전소... 그림자는 농촌에 주민갈등과 환경피해를 드리운다. 축산업의 말단에 있는 축산인도 왜곡된 삶을 살아간다. 가축전염병 때문에 개인의 자유는 제약되고, 이웃을 잠재적 민원인으로 보며 산다. 


우리가 생각해볼 문제는 고기를 먹는 것 자체가 아니라, 동물을 지금처럼 생산하고 소비하는 구조라고 생각한다. 싸게 많이 먹는 소비문화는 생명을 억압하는 사육방식, 미래 자원까지 고갈시켜가며 생산하는 ‘공장식 농장’과 연결되어 있다. 이 소비와 생산의 고리가 가축과 인간의 관계를 왜곡시켰다. 이 왜곡이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는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다.


직접 도축해야만 돼지를 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기의 이면을 몇 사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기는 3분 요리처럼 ‘띵동’하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어떤 고기를 먹을지, 선택은 자유이지만, 알고 선택할 때 진짜 자유로운 거라고 생각했다. 


마당에서 돼지 기르기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터를 마련하는 일부터 먹이를 구하는 일, 잡는 일도 혼자 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함께한 덕분에 가능했다. 이웃이 필요했다. ’평촌平村‘은 평평했던 지대를 일컫는 우리 동네의 옛 지명이다. 평평한 공동체가 있었기에 이 또한 가능했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평평한 마을에서 평등한 관계와 평화로운 생태계를 꿈꿔볼 수 있었음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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