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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Nov 01. 2020

24. 널 먹어도 되겠니

돼지를 부탁해

우리는 기업의 식품정책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고 만다. 그 정책은 분명 영양결핍과 부당한 가격과 반-공동체에 근거하며 중앙집권화와 소비자의 무지를 부추기고, 생명을 기계적 관점으로 바라보도록 장려한다.
<돼지다운 돼지> 중, 조엘 샐러틴


동료 돼지의 빈자리를 다른 돼지는 알고 있을까. 평소와 다름 없는데 나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까. 평소와 다름 없는데 내 기분일 뿐일까. 바로 밥 먹으러 오지 않는 것은 그냥 더위 때문일까. 원래 저랬나. 나를 경계하는 걸까. 혼란스럽다. 사무적인 관계랄까, 도축 다음날부터 돼지 우리에는 서로의 행동만 있을 뿐, 교감은 없다. 돼지에 이입하던 감정의 끈이 사라진다.

돼지는 자랄수록 자아가 생긴다. 개 수준의 지능과 교감 능력을 갖고 있는 돼지다. ‘개'만큼 똑똑하다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걸렸다. 도시에서 자란 내게 개는 ‘가족’의 지위에 있는 동물이었다.


염소가 죽었다. 이번 봄에 입양한 새끼 2마리 였다. 언덕 하나 넘어 이웃집에서 준 염생이였다. 밭 이곳저곳을 옮겨주면 알아서 풀을 먹였다. 풀을 먹어주는 건 고마운 일인데, 염생이는 허약했다. 신경 쓸게 하나 둘이 아니었다. 비 내리면 비 막아주랴, 목줄이 엉켰나 봐주랴, 전전긍긍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조금씩 커가는 모습과 머리에 뿔이 자라는 걸 보는 재미가 있었다. 사람을 따르진 않았다. 쓰다듬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자기 난처한 일이 있을 때만 '메에~'하고 구슬피 불렀다. 목줄이 어딘가 걸려 옴짝달싹 못 움직이곤 했다. 어느 날은 땅벌에 쏘여 시름시름 황천에 갈 뻔했다. 풀이고 나무고 헤집다가 벌집을 건드렸다.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다음날 언제 그랬냐는 듯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줄이 풀려 밭작물을 싹쓸이 하기도 했다. 염생이는 샌님의 화신이었다. 도도하지만, 뭔가 허섭했다. 


며칠 전부터 동네 이곳저곳에 출몰하던 들개들의 소행이다. 산책을 하다 언뜻 보았던 세 마리 개다. 한 마리 큰 개와 작은 개 두마리. 이렇게 연을 맺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염소를 공격하는 것은 호랑이, 멧돼지 정도의 큰 동물일 줄 알았다. 염소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았다. 무리가 되면 개도 늑대가 될 수 있었다. 들개들은 멈추지 않고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염소들을 해쳤다. 당장이라도 이 (ㄱ)새끼들을 잡으러 가고 싶다. 하지만 들개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염소는 먹지 않고 밭 한켠에 고이 묻어주었다. 


같은 시기 지역 환경단체에서도 돼지를 키웠다. 돼지를 가장 많이 키우는 지역이었고, 가장 큰 환경 문제는 축산이었다. 돼지와 사람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리려 했다. 프로젝트 이름은 ‘뜰에서 돼지 기르기'였다. 잡아먹는 것이 돼지 기르기의 목적은 아니었다. 결말을 열어두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 퍼지면서 프로젝트는 종료되었다. 돼지를 ‘진짜' 축사로 보내서 살릴지, 도축할지의 기로에 섰다. ‘진짜' 축사는 ‘진짜' 산다고 할 수 없어 보였다. 면회도 안 된다. 이들은 ‘먹음’으로써 돼지를 기억하기로 했다. 뼈는 돼지가 살던 터에 묻어주었다. 내게 세 마리 돼지는 눈앞에 있는 질문이었다. 답은 여전히 미완이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소는 신고 돼지는 먹을까?’ 대부분의 동물은 공장식으로 키워진다. 인류의 반이 도시에 살고, 도시 생활을 위해 밀식 사육은 유지된다. 전제를 빼놓고 동물에 대한 논의는 완성될 수 없다. 우리는 축사와 도축장으로부터 멀어졌다. 죽음에 대한 부채를 느낄 필요가 없어졌다. 우리는 값싼 고기를 즐기되, 생명에 대한 감각을 잃었다. 본능은 남았으되, 윤리는 사라졌다.


돼지가 떠난 자리. 봄이 오면서 토마토가 자란다. 똥으로 나온 씨앗들이 싹을 틔운다. 모종을 밭으로 옮겨 심는다. 돼지와 토마토는 먹고 먹혔다. 나도 먹고 먹힌다. 연결되어 있고, 독자로 존재할 수 없다. 식물도 동물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먹는다. 생명이 생명을 줄 수 있다. 인간도 죽어서 먹이가 된다. 우리는 ‘상호 연결’ 속에 있다. 현대 축산을 상호 연결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돼지는 공장 상품이 되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고기를 먹을지 안 먹을지가 아니라, 동물이 고기가 되기 이전에 존중 받으며 살았는지. 물건으로 취급하진 않았는지 묻고 싶다.


 




다리가 넷인 네 형제의 뒷부분을 쏘아서 기력을 쇠하게 하되 죽이지는 말아라. 그리고 네발 달린 형제의 머리를 너의 손으로 붙들고 눈을 들여다보라. 눈은 모든 고통이 드러나는 곳이다. 네 형제의 눈을 들여다보고 고통을 느껴보라. 그리고는 칼로 네발 달린 형제의 턱 밑, 목을 끊어서 그가 빨리 죽게 하라. 그리고 네발 달린 형제에게 너의 행동에 대해 용서를 구하라. 네가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이 필요한 바로 지금, 육신을 제공해준 네발 달린 너의 형제에게 감사 기도를 드려라. 그리고 네발 달린 형제에게 당신이 죽으면 땅으로 되돌아갈 것임을, 당신이 자매 꽃들과 형제 사슴을 위해 땅의 자양분이 될 것임을 약속해라. 네발 달린 형제에게 이러한 축복을 전하고, 때가 되면 보답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다. 

수(Sioux) 부족의 연장자가 아들에게 주는 충고<채식의 철학>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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