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함이란, 느낌이나 생각이 뼈저리게 강렬한 상태
어김없이 아침은 찾아왔다.
밤새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보며, '하필 첫 출근인데. 미모로 뽑힌 직장인데...'라고 중얼거리다 한국에서 가져온 아껴 쓰는 팩을 한 장 얼굴에 붙여본다.
아, 얼마나 웃기는 상황인가?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남편은 어찌 되었든 S를 만나보겠다고 아침부터 서둘렀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곧바로 S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그런 사람을 뭐 하러 만나? 잘 먹고 잘 살라고 해!!"라고 말은 했지만, 서둘러 나서는 남편을 붙잡진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남편이 잘 해결하고 왔으면 했으니까...
나는 예정대로 첫 출근을 했다. 이미 한참 일을 하고 있던 직원들이 쭈뼛거리며 들어서는 나를 쳐다본다. 인터뷰하러 올 때의 그 용기는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난생처음으로 남편 없이 혼자서 영국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헉! 숨이 막힌다.
인터뷰 날에는 보지 못했던 멋진 백인의 중년 신사가 악수를 청해왔다. 널싱홈의 매니저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나서 뭐라고 한참 이야기를 했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그저 웃기만 했다.
'첫날인데 뭐... 나쁜 말은 아니겠지...'
그 외의 직원들은 Matron(영국의 수간호사)이 소개해 주었고, 정말 다양한 인종의 다양한 사람들과 인사를 했다. 나도 웃으면서 "Nice meet you."라고는 했지만, 처음 들어보는, 발음조차 따라 하기 힘든 그들의 이름들이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노엘이라는 직원을 소개해 주고는 그가 업무 관련 교육을 할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2주간은 노엘과 함께 일하면서 배우고, 교육이 끝나면 정식으로 나의 근무 스케줄이 나온다고 했다. 그렇게 영국에서의 나의 일이 시작되었다. 영국 이민 2년 만에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일을 끝내고 집에 오니 아이들과 남편이 이미 와 있었다. 남편의 표정을 살피려는데, 그가 먼저 "오늘 어땠어? 할만했어?"라고 물어오는 바람에 오늘 반나절 동안 있었던 일을 여러 액션까지 섞어가며 생동감 있게 이야기해 주었다.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애들은 나의 그런 모습이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내 행동을 따라 했다. 한참을 애들과 웃다가 슬쩍 "자기는 어땠어?"라고 묻자,
"나중에 애들 재우고 얘기하자."란다.
말 안 해도 알 것 같은 느낌...
애들을 다 재우고 둘만 남았다.
어렵게 남편이 말문을 열었다. 사무실에 가서 S를 만났지만, 약속이 있다고 해서 몇 마디 못했다고 한다.
그랬겠지... 나쁜 XX.
평소에 남에게 부탁도 못하는 남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열이 올랐다. S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된 남편은 비자문제에 대해 알아보고자 H와 통화를 했는데, 앞으로 60일 이내에 새로운 회사를 찾아서 스폰서십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 가족이 불법체류자가 된다고 했다. 60일이 지나면 이민국에서 연락이 올 거라며 그 외에는 얘기해 줄 것이 없다고 했단다.
60일... 불법체류자...
그 두 단어만 내 머릿속에 남았다. 정말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 우리에게 생겼다. 어젯밤에 너무 울어서인지 이제 눈물도 안 나왔다.
자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곤히 자고 있는 아이들을 한참 보다 보니 이 상황들이 더 기가차고, 분했다.
이대로 한국으로 절대 쫓겨가고 싶지 않았다.
영국에 너무너무 살고 싶어졌다.
문득, 영화 <달콤한 인생>의 대사가 떠올랐고, 혼자 읊조렸다.
S, 넌 나에게 절실함을 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