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민을 왜 갔을까?
자기야, 이민 가는 것 어떻게 생각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어느 날 저녁, 뜬금없이 남편이 나에게 물어왔다. “이민? 무슨 이민??” 느닷없는 질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되묻고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민이 뭐야...’라고 속으로 쫑알거리고 있었다. 남편은 진지한 표정으로 영국에 이민 가서 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다시 물어왔고, 난 할 말이 없었다. 왜냐면...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냥 뭔 일인가 싶었다.
나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일찍부터 해외에서 유학, 어학 연수나 워킹 홀리데이 등으로 스펙을 쌓는 글로벌한 마인드의 사람과는 다르게, "한국에서도 할 일은 많다. 그것부터 하자"며 한국 밖의 일에는 별 관심이 없는 순수 국내 지향적인 사람이었다. 가끔 여행이나 업무 연수차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을 때도 외국에 다녀왔다는 증거 사진들을 남기고, 기념품을 사고, 쇼핑을 잘해서 한국에 돌아올 때 가족과 지인들이 기뻐할 깜짝 선물을 마련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런 내가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삼십 대 중반이 되어서 외국에서 사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Not at all!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나와 달리 영국에서 몇 년간의 유학 생활을 한 남편은 그 시절의 추억들을 가끔 이야기하면서 그리워했다. 우리가 신혼여행을 영국으로 가게 된 것도 그런 남편의 그리움이 작용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다시 영국에 가서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우리의 결혼 생활 '버킷리스트'에 이민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이 이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에 가는 것 생각해 봤어?”
다시 물어오는 그에게,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왜 영국에 가자는 거야?"
"무슨 일 있으면 얘기해 봐. 어서...”
난 남편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조금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일은 무슨 일.. 그게 아니라..”
그제야 남편은 자신이 영국에서 공부했던 것을 알고 있던 지인이 영국에 갈 수 있는 새로운 비자(다른 나라 입국에 필요한 허가를 증명하는 증서)에 대해 알게 되었다며, 남편에게 관심 있으면 시도해 볼 것을 권했다고 한다. 남편은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며 이미 여러 통로를 통해 많이 알아본 것 같았고, 나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려고 했다.
'왜 내가 이민을 가? 난 여기서 잘 살고 있는데...'
'내가 맏딸인데, 우리 엄마, 아빠는 어쩌고...?'
내 귀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때아닌 효심까지 발동해서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보니 건성으로 듣게 되었고,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싱겁게 끝나 버렸다. 남편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는지 더 이상 물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민에 관한 우리의 대화가 다시 시작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날도 부랴부랴 퇴근하고 돌아와서는 제일 먼저 3살 꼬맹이를 씻기고, 8살 딸내미의 숙제를 봐주면서 동시에 아이들 식사를 준비하느라 정말 숨이 차던 저녁 시간이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마지막 에너지를 쥐어짜며 어질러진 집을 정리하던 중에 내 눈에 발견된 것은 ‘50점’이라고 선명하게 쓰여 있는 딸내미의 받아쓰기 노트였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딸내미는 매주 받아쓰기 시험을 보고 있었는데, 지난주는 회사일이 너무 많아 집에까지 일을 가져와서 하느라 받아쓰기 시험을 잊어버린 것이다. 아차! 싶었다.
워킹맘의 생활은 쉽지 않다. 단순히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를 양육하고자 시간과 체력을 쪼개서 써야 하는 것은 나름의 부지런함과 체력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직장과 가정일 중 잠시라도 한 곳에 무게추가 쏠리다 보면 어김없이 일이 생겼다. 정말 디케(Dike)의 저울처럼 그 중심을 잘 잡고 서 있을 수 있어야 직장과 가정의 균형이 유지된다.
이번 경우가 그랬다. 갑자기 늘어난 회사일에 신경 쓰느라 아이를 챙겨주지 못한 것이다. 받아쓰기 시험 전에 딱 한 번만 봐줬으면 될 일이었다. 다시 확인해도 정말 반만 맞았고, 노트 아래에는 ‘노력하세요!’라는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순간, 그 ‘노력하세요!’가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딸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하고자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 영어 유치원을 보냈지만, 유치원에서 요구하는 많은 활동 준비물과 숙제 그리고 시험 준비를 감당하지 못했고, 학원에서 정기적으로 하는 학부모 상담이라도 가면 우울한 마음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일반 유치원으로 옮겼다. 그 과정에서 나는 엄마로서, 내 능력의 한계에 대한 좌절감과 아이에게 미안한 죄책감으로 매우 복잡한 마음이었는데,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의 세포가 깨어나 나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아.. 아프다...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의 하소연이 시작되었다. 처음이 아닌 이야기들, 일과 육아에서 느끼는 한계, 죄책감, 서러움,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 등이 뒤섞인 이야기들을 남편은 잘 들어주었지만, 그 대화의 끝에는 언제나 답이 없었다.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쉽지 않아 내 말이 길어지고, 또 길어졌다.
그렇게 계속된 대화는 외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번졌고, 지금까지 귀담아듣지 않았던 남편의 ‘영국 이민 계획’이 내 귀를 타고 내 가슴에 전달되었다. 듣다 보니, 어느새 우리 아이들은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다양한 아이들과 어울려 잔디에서 뛰어놀고 있었고, 그 옆에서 아이들을 행복하게 바라보며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우리 부부의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맞아! 내가 원하는 게 이런 거야...
'영국은 선진국이쟎아.. 한국보다는 좋겠지..'
'영국에서 교육받으면 영어도 잘하게 되고, 글로벌한 아이들이 되는 거지.. 으흐흐흐'
머릿속 어딘가에서 이런 속삭임이 들렸고, 여기에서 살 듯이 전력을 다해서 살면 영국에서도 무엇인가는 잘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남편이 영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으니 큰 어려움도 없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용기와 믿음이 생기니 이제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래, 해보는 거야.. 까짓것 해보지 뭐...
삼십 대 중반에 아이가 둘인 내가, 영어도 못하는 내가, 이민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영국 이민이라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하게 만든 것은 딸내미의 50점짜리 받아쓰기 노트가 발견된 순간, 그 타이밍(timing)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