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엄마 일기 1편] 아기 낳는 날
임신 시절 가장 두려운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아기 낳는 상상이었다.
누구는 배 위로 덤프트럭이 지나가는 느낌이라느니, 항문으로 수박을 낳는 느낌이라느니 등등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무용담(?)으로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상해도 도저히 알 수 없는 출산의 고통. 그렇다 나도 만삭이 되어가자 출산의 고통을 가늠할 수 없어서 고통받고 있었다.
또 다른 두려움은 아이가 언제 나올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제왕절개가 아닌 이상, 예정일에 딱 맞춰 나오는 아이들은 드물 것이다. 보통은 예정일 한 달 전부터 출산 가방을 싸놓는다고 해서 나도 시대의 흐름에 따랐다.
커다란 캐리어를 꺼내 한 달 전부터 생각나는 것들을 던져 넣기 시작했는데, 대략의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이런 것들이었다. 젖병, 젖꼭지, 기저귀, 배냇저고리, 속싸개, 겉싸개, 손싸개, 발싸개 등의 아기 용품들과 산모패드, 회음부 방석, 팔목 보호대, 복대, 내복, 수면 양말, 아빠 이불, 그릇이나 일회용 컵 등의 엄마 용품들이었다.
분명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분만실임에도 뭐 빠진 건 없는지 인터넷에서 체크리스트까지 뽑아가며 짐을 쌌다. 그중 심심할까 봐 구겨 넣은 잡지와 책은 펴볼 겨를도 없이 도로 들고 왔고, 잊어버린 게 많아서 매일 신랑이 올 때마다 하나씩 심부름을 시켜야 했다.
많이 운동하면 쉽게 낳는다고 해서 6개월가량부터 임산부 요가도 시작했다. 막달이 다가오자 같이 요가를 하던 동지들이 하나둘씩 출산을 하며 사라지는 '배틀 로얄'같은 광경을 보면서 이제 내 순서가 오지 않을까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누워도 불편하고, 저렇게 누워도 불편한 남산만 한 만삭 배를 움켜잡고, 핸드폰으로 출산 전 증상을 검색했다. 동시에 엄마 카페에 들락날락하면서 출산 후기를 읽었다. 출산하기 며칠 전부터 약간 이슬이 비치기 시작했고, 오늘인가 내일인가 두근 반 세근반 하며 아이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그 날이 왔다.
자다가 6시 반쯤에 눈을 딱 떴는데. '오늘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었다. 나는 자고 있는 남편을 깨우지 않고 조용히 거실로 나가서는 아직까지 완성하지 못한 채 널브러져 있던 배냇저고리를 들었다.
TV에서 재탕 삼탕으로 재방을 하고 있던 어벤저스 영화를 보면서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완성했다. 2-3시간가량의 폭풍 바느질을 끝내고 그때까지 자고 있던 신랑을 조용히 깨웠다.
"자기야 아무래도 오늘 아기가 나올 것 같아"
신랑은 번쩍 눈을 뜨긴 했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사실 나도 몰랐다. 오늘이 그날인 것 같다는 느낌뿐이었으니까. 나는 차분히 세상에서 가장 먹고 싶은 것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아기를 낳을 땐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고기를 먹는 게 좋다고 했다. 달달하면서도 적당하게 양념이 밴 돼지 양념갈비를 철판에 치익칙 구워 먹는 상상을 했다. 아기 낳는 날 먹기 딱 좋은 음식 같았다. 양념갈비 집에 방문해서 남산만 한 배를 움켜잡고 폭풍 흡입을 하기 시작했다.
자못 비장하게, 알뜰하게 남김없이 고기를 먹었다. 그리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하다 일단 좀 걷기로 했다. 차를 타고 한 시간 가량 달려서 수목원에 도착했는데, 입구에서 무언가가 활칵 흘러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야 아무래도 수목원은 못 갈 거 같아."그때부터 약간 멘붕에 빠질 것 같았지만 정신을 부여잡고 침착하게 산부인과에 전화를 했다. 여차여차해서 전화했는데, 오늘이냐고. 정녕 오늘이냐고. 간호사는 일단 와보라고 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일단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그리고는 슈퍼로 달려가서 쵸코맛 쭈쭈바를 사 왔다. 아기를 낳으면 한동안 차가운 것을 먹지 못한다는 선배들의 말이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쭈쭈바를 물고 다시 돌아가는데 그 길이 어찌나 느리게 느껴지는지. 괜히 외곽으로 나와서 차에서 애를 낳는 건 아닌가 무서웠지만, 지나고 보니 이건 다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첫 아이는 그리 쉬이 나오지 않는다.
병원에 도착한 우리는 검진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내일 전에는 나오겠네요. 월요일까지 소식이 없으면 유도 분만합시다. 5분 간격으로 진통이 오면, 병원으로 오세요.
'역시 내 예감이 맞았어. 나의 동물 같은 직감은 벗어난 적이 없지'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차분하게 세차를 했다. 뒷좌석에 카시트를 설치하고 집으로 가서 부른 배를 부여잡고 청소를 하고, 쓰레기통을 비웠다. 그리곤 저녁으로 내가 좋아하는 새우버거 세트를 먹으며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진통이 조금씩 오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 생리통이 심했던 터라 아주 심한 생리통만큼의 고통이었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 게 계속 아픈 게 아니고 한 10초? 20초? 정도의 진통이 10-20분 간격으로 오는 거다. '윽! 하~ 윽! 하~' 반복하면서 초시계로 시간을 재고 있었다.
진통 간격이 조금씩 짧아지고 있었다. 10분이었던 것이 9분이 되고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면서 나는 땀이 났다. 토요일 저녁이라 개그 프로를 보고 있었는데, 개그고 뭐고 간에 세상에는 나와 초시계만 덩그러니 놓아져 있는 것 같았다.
너무 빨리 가면은 병원에서 대기해야 한다는 말에, 5분 진통이 올 때까지 집에서 차분하게 기다렸다. 철없고 생각 없는 신랑은 "너 정도 아파서 아기 낳겠냐"며 "바닥 정돈 기어야지 애기가 나온다"며 깔깔거리면서 개그 프로를 보았다.
참을성이 많은(?) 나는 이게 진진통인지 가진통인지, 어느 정도에 병원에 가야 하는 가를 두고 수차례 고민하다, 저녁 10시 마음을 먹었다. 병원으로 가겠노라고. 문 앞에 싸놓았던 캐리어를 들면서도 '이대로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닌가. 무진장 아프긴 한데, 또 죽을 만큼은 아닌 것도 같고, 집에 있자니 당장이라도 나올 거 같은데 병원에서 기약 없이 기다리는 건 또 싫고'를 무한 반복하며 병원에 도착했다.
진찰을 해보니, 벌써 20프로가 진행되어서 당장 입원하라는 게 아닌가. 내가 선택한 병원은 르봐이예 분만이라고 자연주의 어쩌고 하는 건데, 다른데서 안 낳아봐서 모르겠지만 나름 만족스러웠다. 단독 일인실에 침대랑 소파랑 놓여있는데 신랑이 소파에서 같이 대기하고 아기 낳는 것도 지켜볼 수 있었다.
입원실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는 일차 고통에 직면했다. 바로 관장. 관장 약을 넣고 몇 분인가를 기다려라는데, 뭐 일분도 참지 못해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갔다. 격렬한 고통이 지나고 두 번째. 아기 낳는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바로 '내진'.
아기 나올 곳에 손을 넣어서 아이가 얼마큼 내려왔는지 검진하는 건데, 내 입장에서는 정말 두 손이 부르르 떨리는 고통이었다. 또다시 철없는 신랑은 "왜 침대에 커튼만 치면 죽어서 나오냐"며 재미없는 농담을 던졌지만, 정말 상상하기도 끔찍한 느낌이었다.
간호사한테 내진을 꼭 해야 하는 거냐며 울부짖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30프로 40프로 정도 자궁문이 열렸을까. 이제 무통 주사를 맞아도 될 거 같다고 했다. 무통을 맞으니 세상 이런 천국이 없었다. 너무 아무 느낌이 안 나서 과연 힘이나 제대로 줄 수 있을까 싶은 정도였다.
그리고는 2시간 후 급격하게 출산은 진행되어서 새벽 2시쯤 자고 계시던 담당 의사 선생님이 자다 말고 머리에 까치집을 짓고 출동하셨다. 그리곤 마취로 얼얼한 다리로 힘을 몇 번 주고 있는데, 신랑이 말했다.
나왔어 나왔어
간호사는 내 가슴 위로 아이를 올려주었다. 못생긴 핏덩어리 꼬물이. 내 아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잠시 맨가슴에 올려서 아이를 올려 안정을 취한 후, 신랑은 자뭇 비장하게 가위를 꺼내 들어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탯줄을 잘랐다.
그리곤 간호사 선생님이 우리 첫 가족사진을 찍어주셨다. 산발에 손을 덜덜거리면서 기념사진 이라니. 무방비 상태로 기습당한 느낌이라 그땐 웃겼지만, 지금은 너무 소중한 사진이 되었다.
그렇게 아이는 나에게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