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는 지난 사랑을 알고 있다.

두 번째 진담

by 제제

최근에 본 드라마 중, 1997년 IMF 시절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있다. 직원도, 돈도, 팔 물건도 없는 무역회사의 초보 사장이 된 ‘강태풍’이 고군분투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은 <태풍상사>다. 드라마 첫 화부터 눈길을 사로잡은 건 그 당시를 잘 보여주는 풍경, 사람들의 옷차림과 말투, 소품 같은 것들이었는데 특히 내 눈에 띈 건 삐삐였다.

책장 아래 구석진 곳에서 뽀얗게 먼지 쌓인 작은 상자를 꺼내 열어보니, 오래전에 사용하던 다양한 물건이 쏟아져 나온다. 교복에 달던 이름표, 작은 노트와 몽당연필, 슬램덩크 강백호 뺏지, 녹슨 목걸이, 피치파이프, 뜨개실로 만든 미니 덧버선 등등. 내가 찾던 물건도 거기 있었다. 빨간색 투명 플라스틱 소재로 된 나의 마지막 삐삐. 지금이라도 건전지를 넣으면 보란 듯이 작동할 것 같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다.



이걸 처음 산 게 언제였더라. 마지막으로 삐삐를 쓰던 게 스무 살 정도였고 이후엔 휴대폰을 사용했으니 아마도 고등학교 때쯤일 거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그 시절 친구들과 삐삐를 주고받은 기억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삐삐와 관련해서 유일하게 떠오르는 추억이라고는 딱 하나.

잊을 수 없는 네 자리 숫자, 9999.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매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그 사람에게 삐삐를 보냈다. 보낸 사람 번호는 9999, 받는 사람은 그 시절 내가 짝사랑했던 같은 과의 노래패 선배. 음성 메시지엔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를 틀어서 음악을 보냈는데, 그냥 이렇게라도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의실에 모여 정기공연 때 부를 노래를 연습하다가 잠시 쉬던 참이었다. 나의 짝사랑 선배가 저쪽에서 다른 선배 언니랑 얘기를 나누며 내가 보낸 삐삐 메시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혹시라도 들킬까 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지만 아닌 척 슬그머니 근처에 앉아 둘의 대화를 훔쳐 들었다. 선배는 도대체 9999가 무슨 의미인지, 또 누가 매번 음악 메시지를 보내는 건지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당시 삐삐를 쓰는 사람들 사이엔 약속된 숫자 메시지 같은 게 있었다. 예를 들어 1004는 ‘천사’, 8282는 ‘빨리빨리’, 486은 ‘사랑해’ 같은 식이다. 내가 보낸 9999라는 숫자에는 ‘행운’이라는 뜻이 있었는데, 숫자 9 네 개를 모으면 네잎클로버 모양과 비슷해서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바부팅이,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다니...’ 나로선 답답할 노릇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걸 내가 알려줄 수도 없었다. 결국 그 선배는 그해 겨울, 군대에 갔다. 내가 그 메시지를 보낸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지금은 그 선배의 소식도 잘 모를 만큼 멀어졌지만, 그때 수줍던 마음을 전해준 사랑의 메신저 삐삐는 내 곁에 남아 있다. 물론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면 삐삐의 존재 역시 계속 잊고 있었겠지만...

그 시절 너무 소중하고 애틋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변함에 따라 잊혀지는 건, 물건만이 아니다. 사람 역시도 그러하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과 일상을 나누는 순간이 줄어들고, 그렇게 점점 멀어지다가 결국 잊혀지게 된다는 사실이 한때는 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잊혀진다는건, 두려움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지금은 나 또한 누군가를 잊고, 누군가에게 잊혀지면서 그렇게 그냥 살아간다.

그래도 다행인 건 우리에겐 이야기가 남아 있다. 내가 그 이야기를 떠올리는 순간, 잊혀졌던 그 사람도, 기억도, 감정도 이야기 속에서 되살아난다. 근데 그 이야기조차 잊으면 어떡하냐고? 글쎄, 불현듯이 또 떠오르지 않을까. 나의 삐삐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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