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창한 나무가 빛을 모조리 먹어버린 어둑한 숲 속. 좀 전까지 분명 낮이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둑한 숲 속이었다. 아카시아 향기가 코를 찌른다. 나는 갑작스런 인기척에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누, 누구세요?"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사이로 빼꼼히 흰 여우의 까만 코가 보였다. 잔뜩 긴장했다 친근한 여우의 얼굴을 보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안심도 잠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여우가 말을 한 것!
"인간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먼."
이게 무슨 소리야? 아 꿈이구나! 어쩐지. 나는 두 손으로 양 볼을 때렸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인간의 몸으로 이 숲까지 흘러들어왔는가.?"
나는 눈을 감고 못 들은 척하다 한쪽 눈을 슬쩍 떠보고는 기겁을 했다. 회오리 모양의 보라색과 분홍색 뿔을 가진 유치 뽕짝 모양의 유니콘, 금빛 털을 가진 호랑이, 에메랄드빛 눈동자 토끼까지! 아동용 애니메이션에 나올듯한 동물들이 나를 둘러싸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슬쩍 훔쳐보았다.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 우울증이 도져서 두문불출하긴 했지만, 환각이 나타난 적은 없었는데?
내가 대답이 없자 그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돌아서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인간이 확실한 거야?"
"확실하다니까. 외모는 둔갑할 수 있지만, 냄새는 못 바꾼다고. 내 코는 아무도 못 속이지."
"근데 어떻게 이 숲에 들어왔지? 그날 이후로 완전히 막혔을 텐데."
잠시 후 그들은 나를 향해 돌아섰다.
"이 숲을 관리하는 분이 계시네, 그분께 의견을 묻고 너를 이곳에 머물게 할지 결정하도록 하지."
할아버지 목소리의 은여우가 말했다.
"모 못 머물게 하면요? 여기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당연히 나가는 길도 모른다고요!"
사실 낯선 것은 동물들(심지어 말을 하는!)도 마찬가지였었는데, 숲에 혼자 남겨진다고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울먹이며 소리치고 말았다.
"그녀는 그렇게 매정한 분이 아니야. 걱정 마."
에메랄드 토끼가 상냥하게 말했다.
"그래! 그리고 지금 어두워서 그렇지 이 숲은 위험한 거라곤 없는 곳이야."
금빛 호랑이가 애교 있는 목소리로 말하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호랑이가 윙크라니 얼떨떨했지만 일단 은여우 뒤를 쫓아 발걸음을 옮겼다.
짙은 아카시아 향기와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 낮게 뜬 달만이 선명한 이 낯선 숲을 말을 하는 동물들과 걷고 있는데 왜 마음이 편안한 걸까? 편안함을 느낀 것이 아득할 만큼 오래 전인 것 같았다. 모두들 조용히 걷고 있었지만 밤눈에 어두운 내 걸음에 맞춰 배려하는 게 느껴져서일까?
단단했던 내 어깨는 어느새 살폰 내려가 있었다.
어둠 속 더 어두운, 동그랗고 검은 호수에 도착했다. 은여우가 물가를 톡 튕기자 주변이 밝아지더니 잠시 후 한 여자가 나타났다.
온몸에서는 은은한 빛이 났고 물결치는 머리카락이 그녀를 감싸고 있을 뿐 실오라기 없는 알몸이었다. 그녀의 목덜미엔 보랏빛 자수정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이 아이인가?"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익숙하고 그리운 느낌에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왔다.
"예,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하고...그, 나가는 길도 모른다고 합니다. 겁을 먹은 거 같은데, 좀 안정을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울자 동물들은 앞다퉈 나를 변호해 주었다. 그들의 따듯함에 또 한 번 눈물이 났다.
"그래. 따듯한 음식을 주고 푹 쉴 수 있도록 해주거라."
그녀의 말에 동물들은 자기 일인 듯 기뻐했다. 도착한 작은 오두막은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듯 바닥이 따스했다. 나는 동물들이 내준 깨끗한 이부자리에 누웠다. 포근한 이불을 턱까지 끌어당기는 순간 소독약 냄새가 코를 스쳤다.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나를 처음 봤을 때, 인간을 처음 본 것 같았는데 왜 집과 이불이 있는 거지? 의심스러운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환상 속에 영원히 머무르길 원했다. 나는 눈을 감고 영원히 깨지 않길 바라며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부드러운 손길에 눈을 떴다. 머리맡에 호숫가에서 본 여인이 나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다.
"편안히 쉬렴. 그렇지만 언젠가는 돌아가야 해. 네가 떠나온 곳으로."
"싫어요. 이곳에 있게 해 주세요."
나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흐느껴 울었던 것 같다. 그녀의 대답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이 깼을 땐 해가 중천이었다.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제 잠들 때 그대로였다. 따스한 햇빛만이 이부자리와 방을 절반으로 갈라놓았다.
문을 열고 나가니 유니콘과 토끼가 투닥거리며 상을 차리고 있다.
"일어났어? 시간이 늦어서 가볍게 먹으라고 죽을 끓었어. 어서 와서 먹어봐."
아, 그래. 엄마가 있을 땐 늦잠을 자면 죽을 끓여 줬었지. 너무 어릴 때라 잊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날 위해 차려준 따스한 밥상 따위 받아본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나도 사랑받았던 적이 있었구나. 하지만 엄마는 날 떠났다. 어린 나를 남겨두고! 엄마가 떠오르자 기억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엄마가 떠난 후 아빠는 망가진 삶을 살았고, 날 키워준 할머니는 원망과 속상함을 나에게 풀었다. 너만 없었어도 느이 아빠도 새 출발했을 텐데...너만 아니었어도 그년을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텐데로 시작하는 끝없는 구박과 잔소리도, 웃으면 엄마를 닮아 남자 후릴 눈웃음을 친다고 했고, 공부하면 엄마 닮아 헛바람 든다고 집안일이나 하라고 해도 참을 수 있었다.
그날 밤 아빠가 술에 취해 엄마 이름을 부르며 내 침대로 기어 올라오지만 않았다면 꾸역꾸역 참고 살아내 보려 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뱃속 깊은 곳에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어젯밤, 난 유리잔을 깨트렸고 내 팔 파리한 핏줄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솟구치는 피를 본 게 마지막이었다.
이제 알 것 같았다. 난 도망쳤다. 어린 날의 내가 만들어낸 상상 속 세상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늘로 돌아간 선녀 엄마와 동물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조용했다. 동물 친구들도 따스한 죽도 온데간데 없었다.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병원 침대의 바스락거리는 부직포 베개에 누워 있었다. 꿈이었구나. 살아있구나.
그때 아카시아 향기가 창밖에서 흘러들어왔다. 나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틀에는 자수정 목걸이가 놓여있었다. 나는 창밖으로 가슴을 내밀었다. 아카시아 꽃잎이 바람에 휘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