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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루아 Jun 18. 2022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

<3000자 단편>

아얏! 따끔한 느낌에 우진은 흠칫 놀라며 팔을 감싸 안았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오며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붙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바삐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뿐. 찝찝한 느낌에 소매를 걷어 올리고 따끔한 느낌이 들었던 오른팔 주변을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착각인가?'

우진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걸음을 재촉했다. 약속시간이 빠듯했다. 며칠을 야근으로 불태우고 일이 얼추 마무리되어 평일 휴가를 얻은 터였다. 여자 친구인 세연과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고 싶었지만 중요한 미팅이 있어 연차를 낼 수 없다고 해서 다른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연극을 보고 느지막이 점심을 먹고 맥주도 한잔할 생각을 하니 우진은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맥주는 조금만 마시고 세연의 퇴근시간에 회사 앞으로 마중을 가서 깜짝 놀래켜줄 생각이었다.

평일 낮 시간이지만 번화가라 거리가 꽤 복작거렸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쇼핑몰 입구에는 커다란 전광판에 스타트업에서 개발한 신약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선 우진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에게 엄마처럼 보이는 여자가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듣자 하니 여자애가 학원 간다고 하고 쇼핑몰에 왔다가 엄마랑 마주친 것 같았다.

멍하니 그들을 구경하던 우진의 눈에 낯익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옆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오늘 분명 종로에서 미팅이 있다고 했는데..?"

잘못 본 건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어깨에 슬쩍 걸친 연갈색 가방, 손가락 사이에 미끄러지듯 걸쳐있는 연보라색 휴대폰 모두 여자 친구 세연의 것과 똑 닮아있었다. 휴대폰을 들지 않은 한 손은 옆에 뒤돌아서 있는 남자의 허리에 팔을 둘러 그의 바지 뒷주머니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있었다. 세연이 그와 걸을 때 늘 하는 행동이었다.

"세연아!"

우진은 그녀를 부르며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그녀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죠?"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우석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가 아는 세연과 전혀 다른 목소리. 하지만 얼굴은 틀림없는 세연이었다.

“세연아..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오늘 미팅 있다더니..”

우진의 말에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사람 잘못 보셨나 봐요.”

세연은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옆에 있는 남자의 팔을 잡아끌고 뒤돌아 가기 시작했다. 우진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쳐다봐?"

진석의 목소리에 우진은 고개를 돌렸다. 오늘 만나기로 한 친구였다.

"세연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세연이가 아니야. 목소리도 눈빛도 세연이가 아니야"

우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다 말고 황급히 휴대전화를 눌렀다. 전화벨이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이 울리도록 세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야 인마! 왜 그러는데?? 어디에다 전화하는 거야?"

"세연이가 전화를 안 받아."

진석에게 대답을 하던 우진의 손에서 휴대전화가 툭 떨어졌다. 휴대전화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쇼핑몰 타일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세연, 아니 세연의 얼굴을 한 그녀와 다정하게 허리를 감싸고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짙은 피부색과 약간 비뚜름한 콧날, 흉터로 인해 왼쪽 눈썹 끝이 오른쪽 눈썹보다 짧고 무딘 것까지 바로 우진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 남자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은 그 순간 우진은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싸우고 있는 모녀의 소리였다.

"왜 이러세요? 저 아세요? 제 이름은 효정이가 아니라니까요?"

"이 년이 땡땡이친 것도 모자라서 엄말 모른척해? 목소리는 또 왜 그래? 술 마셨어?"

그때 또 하나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엄마 여기서 뭐해?"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똑같은 얼굴을 한 두 여자가 중년의 여자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우진은 눈앞이 흐릿해졌다. 점점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길을 걸어가던 사람이 흠칫 놀라며 팔을 움켜쥐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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