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루아 Jun 18. 2022

소주와 떡볶이

<3000자 단편>

한겨울인데도 반팔 티를 입고 두 손에 목장갑을 낀 채 적재작업이 한 창인 사람들 사이에서 그를 발견했을 때 연희는 두 눈을 의심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센터를 둘러보는 그녀의 뒤꼭지를 따라다니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채 했다.

"안녕하십니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인사 속에 섞인 그의 목소리를 듣자 연희는 차마 그곳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급한 일정이 생각났다고 말하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와 도망치듯 본사로 돌아왔다.

사무실 책상에 앉은 연희는 애꿎은 책상 앞 명판을 노려보았다. 최연희 상무.  그녀의 이름과 직함이 검은색 바탕 위에서 황금색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 단 한 번의 일탈이었는데 이렇게 일이 틀어지다니...'

그날이 마지막이어야 했다. 단 한 번 만이라고 생각했기에 그곳에 갔고, 그래서 그와 잠자리를 가진 거였다.

연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결혼식을 불과 이주 남기고 이런 고민을 할 거라고 상상이나 해 봤을까?

재미없는 인생, 사랑 없는 결혼이지만 피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적극 추진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지금까지 누려온 것, 그리고 앞으로 누릴 것들에 대한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남자 형제들을 제치고 최연소 임원이 되었다는 것은 그룹을 상속받는 데 한 걸음 다가갔음을 뜻했다. 거기에 쐐기를 박고 싶었고 삼호 전자 장남과의 결혼은 그 기회였다.

사랑 따위는 그녀의 야망 앞에서 그저 어린 시절의 떡볶이 같은 거였다.

한때 친구들과 몰려가 먹는 허름한 떡볶이집에 떡볶이가 간절히 먹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참새처럼 재잘거리며 떡볶이집으로 몰려가는 그녀들이 부럽기도 했고 지나칠 때 맡아본 알싸한 매운 냄새에 그 맛이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교복 소매에 떡볶이 국물을 묻힌 채 상기된 표정으로 집에 들어왔을 때 어머니의 표정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쯧쯧... 당장 그 냄새나는 옷이랑 몸부터 씻거라."

그때는 서운했지만 그녀에겐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어머니의 인정과 사랑이 더 중요했고 자라면서 떡볶이 따위에 목을 매고 친구들을 부러워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 후로 그녀는 최고급만 누리고 먹고 사용했다.

하지만 그녀도 사람인지라 결혼을 앞두고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떡볶이처럼 별건 아니지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이라고 생각했다.

"상무님. 부문 전체 송년 회식인데 참석 가능하실까요?"

평소에 회식 자리에 절대 참석하지 않는 그녀이기에 비서는 형식적으로 물었지만 흔쾌히 가겠다고 한 것은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처음 먹어본 싸구려 희석식 소주는 생각보다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소주잔에 찰랑찰랑하게 넘칠 듯 따르며 사랑하는 만큼 따르는 거라던 여직원의 빈말이 듣기 나쁘지 않았고, 아부 떠는 거냐고 그녀를 통박 주다 깔깔대며 웃음을 터트리던 여직원의 동료들을 따라 연희도 같이 웃고 말았다.

시끌시끌하고 고기 냄새 가득한 회식장소를 빠져나온 그녀는 박 기사에게 전화하지 않고 잠시 걸었다.

소주 두어 잔 마셨을 뿐인데 매서운 겨울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걷다 보니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는 문 앞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기네스 한 병이요."

맥주를 시키고  음악에 맞춰 흔들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그곳에서 웃지 않는 사람은 그녀 하나인 것 같았다.

연희는 사람들을 따라 미소를 띠고 발을 까딱이며 박자를 맞춰보았지만 이내 관두고 주위를 의식하며 두리번거렸다.

“혼자 왔어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급하게 몸을 돌리다 의자에 걸친 가방이 떨어졌고 동시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한 손에 그녀의 가방을 주어들고 캑캑거리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던 그가 놀리듯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요."

싱긋 웃으며 냅킨을 건네는 그는 그녀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였다.

"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 바른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 와! 회사 사람이랑 이야기하는 줄. 원래 말투가 그래요? "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 클럽 처음 와봤죠? 딱 봐도 티 나요. 이러고 있지 말고 우리 춤춰요."

 스테이지 한가운데로 간 그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마음껏 몸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그녀가 소외되거나 어색하지 않도록 그녀 주변을 맴돌며 배려해 주었다. 조금씩  긴장이 풀어졌고 어느 순간 그녀도 웃고 있었다.

춤을 추자 뜨거운 조명에 땀이 났다. 그의 얼굴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빛이 났다.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그가 그녀에게 하는 말이 잘 들리지 않아 연희는 그의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그의 입김과 맥주 향이 그녀의 귓가를 간질이자 연희는 가슴이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그거 알아요? 오늘 나한테 진짜 특별한 날인 거."

그의 말에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더 같이 있어주면 이야기해줄게요. 오늘 집에 안 들어가고 싶거든요."

그는 마치 센척하는 중2처럼 이야기했지만, 연희는 쓸쓸한 그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나랑 똑같네요. 오늘 나한테도 진짜 특별한 날이거든요."

연희가 대답했다.

"그리고 나도 오늘 집에 안 들어갈 건데."

활짝 웃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귓불이 붉었다. 그들은 그날 밤을 함께 보냈다.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사랑을 나누었다

연희는 처음엔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 시작했는데,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노라고, 그런데 이것마저 그만두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서 멈출 수가 없다고 고백했고 그는 춤을 추고 싶어서 클럽을 다녔는데, 그게 유일한 탈출구이자 행복이었는데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이제 진짜 어른이 되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들은 진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키스하고 사랑을 나누고 서로를 안고 쓰다듬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서로의 이름은 묻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는데 … 자신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마지막 증거이자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두고자 했는데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연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늘은 예비신랑과의 첫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연희의 예비신랑인 삼호 전자 장남은 박사과정을 위해 늦깎이 유학을 갔다 결혼식 준비를 위해 며칠 전 입국을 했다. 연희는 정략결혼이라지만 결혼식을 이주 앞두고  첫 만남이라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유학은 핑계일 뿐 개망나니처럼 살다 외국으로 쫓겨간 거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연희는 개의치 않았다. 예비 시댁과 만나기로 한 음식점 앞에 내리려는 순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 네 엄마. 바로 앞이에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 오늘 니가 간 안성 물류센터에 삼호 전자 물건 들어오잖아. 우리 예비사위가 오늘 거기 갔었다던데 못 봤니? 현장 가까이서 느껴보고 싶다고 가서 직접 일도 했다던데.  기특하기도 하지."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 연희 씨?"

그의 목소리가 연희의 가슴을 간질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