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어른도 괜찮아 ⑦] 땀 흘리며 하는 운동의 즐거움
스쿼시를 사랑한다. 아쉽게도 짝사랑같지만, 4년째 이 운동을 하고 있다.
스쿼시를 처음 본 건 텔레비전에서였다. 드라마 주인공이 심란할 때면 찾아가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다 바닥에 드러눕는 장면. 손발이 오그라들긴 했지만, 어쨌든 드라마를 보고 스쿼시를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근데 너무 힘들어서 주저앉거나 드러눕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 비슷한 종목으로 테니스도 있지만 그건 라켓이 너무 무거웠고, 스쿼시가 더 역동적이어서 좋았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그런 느낌.
은평구에 하나 있다는 스쿼시 센터를 찾아 등록하고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 위기는 시도때도 없이 찾아왔다. 그러니까 어른이 되고 나선 목에 피맛날 정도로 뛸 일이 없는데, 스쿼시에서는 목에 피맛날 정도가 아니라 힘들어서 허리가 절로 고꾸라지는 일이 생겼다. 초반엔 자주.
배우다 중간에 사정이 있어 몇 달 못 나가기도 했는데, 쉬다 다시 나갈 때면 처음 운동을 시작했을 때처럼 팔부터 엉덩이까지 안 쑤시는 데가 없었다(엉덩이가 왜 아프지 싶겠지만, 배워보시면 아시리라... 스쿼시는 ‘런지’가 기본 자세다). 강습 때 공을 친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보면 ‘내가 왜 이걸 또 한다고 왔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스쿼시를 시작할 때부터 이미 ‘짝사랑’에 빠졌다. 강습이 있는 월, 수, 금엔 약속도 잡지 않았다. 스쿼시를 더 잘 치겠다는 일념 하나로 헬스에도 열을 올렸다. 헬스장을 끊어도 한 달을 꾸준히 다니기 힘들던 나였지만 목적이 생기니 달라졌다. 하지만 ‘짝사랑’이 늘 그렇듯, 내가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하는데도 실력은 더디 늘기만 했다. 그래도 나는 운동하기를 4년째 포기하지 않고 있다.
운동에는 실패가 없다.
운동한 만큼 근육이 늘고, 자주 연습한 만큼 실력도 는다. 그런 의미에서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맞는 말이다. 진짜 ‘땀’을 흘린 만큼 돌아오니 적어도 운동에서는 실패가 없다. 이 고통을 참기만 하면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으니 얼마나 착한 고통인가. 주변 사람, 내 환경 모두 고려할 필요 없이 내가 이 고통을 참고 견디기만 한다면 성장은 보장돼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정직하고 단순한 고통이 참 좋다.
마음이 복잡한 날에 정신없이 러닝머신을 뛰다 보면, 공 하나를 치는 데 집중하다 보면 고민거리는 어느새 잊게 된다. 2시간 뒤 운동이 끝나고 집에 갈 때 즈음엔 내 온 마음을 짓눌렀던 고민은 어느새 흐려져 있다. 스쿼시나 스피닝처럼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운동이면 더 좋다. 번뇌도 체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니까.
코로나로 센터에 몇 달씩 못 가기도 하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갈 수 있을 때면 자전거를 타고 운동을 하러 간다. 지독한 짝사랑에 실력이 더디 늘어도 분명 나아지고 있으니, 또 뛰고 나면 뛰기 전보다 훨씬 행복해져 있으니 오늘도 스쿼시 가방을 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