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어른도 괜찮아 ⑧] 거기에 무엇을 걸었나요
내 감각을 이런 식으로 발전시키고 싶진 않았다. 누가 뭐라 그러거나 말거나 무신경한 듯, 못 들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심하게 살고 싶었다. 다른 말로는 편하게.
비유하자면 힘있는 한 마리의 코끼리처럼 눈치볼 필요 없이 살거나, 그게 안 되면 나무늘보라도 돼서 자기 속도대로 살고 싶었다. 근데 사회에 나온 나는 한 마리의 미어캣이 되어 모든 오감으로 외부의 위기상황을 감지한다.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다는 불안에 쫓긴다.
주변을 둘러보면 유독 여유있고 인자한 미소를 띤 이들이 있다. 신기할 정도로 어떤 상황에서도 쫄지 않는. 나는 그 특유의 여유가 부럽다. 이번 기회가 가도 다음 기회가 있다는 식의 편안함이 주는 여유.
공교롭게도 내가 만난 그런 사람 중 많은 이들이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들에겐 기회가 지금 놓쳐도 3분 뒤 반드시 오는 버스처럼 또 찾아올 것만 같다. 그러니 버스가 떠난다고 백 미터를 달려갈 이유도, 절망할 이유도 없다. 버스는 또 오고, 맘에 안 들면 갈아타면 되니까.
예민해지지 않기엔 나는 여유가 없었다. 예민의 반대말은 둔감이 아니라 여유다. 여유 없는 둔감함은 없다. 밤길이 무섭지 않기 위해선 힘의 여유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선 돈과 시간의 여유가 필요한 것처럼. 하지만 많은 순간 나는 '재수는 없다'는 고3의 마음으로 살았다. 절박함을 얻는 대신 여유는 잃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 상처를 줬던 언니가 마냥 밉지만은 않았어. 그냥 안타까웠지. 언니도 나도 모두 피해자였어. 언니가 좀 더 여유로운 상황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자신을 절벽 끝으로 몰아세웠을 리도, 한참 어린 동생에게 바닥을 보일 일도 없었을 거라고 믿으니까. - <아무튼, 언니> p.78
모든 걸 걸고 무언가를 하는 심정이라면 누구나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당신이 예민한 이유다. 그래도 우리는 그 절박함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 여유가 없어도, 내 뒤를 받쳐줄 백이 없어도, 어쨌든 무언가를 계속 해나가려고 애쓰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예민해질 이유도 없으니까.
그러니 예민한 자신을 너무 '성격 나쁜 사람'으로만 취급할 필요는 없다. 너무 이루고 싶어서, 두렵지만 해내고 싶어서 그런 걸 수도 있으니.
예민한 당신, 거기에 무엇을 걸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