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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주 Feb 14. 2022

500번째 스쿼시

[아무튼 스쿼시]


“그때의 저보다 훨씬 잘하시는 거예요.”

“에이~”

“진짜예요.”


스쿼시를 시작한 지 1년 됐다는 회원들은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들은 스쿼시가 잘 늘지 않는다고 속상해했다. 하지만 1년 차의 나와 비교하면 그들의 실력은 훨씬 좋았다. 그건 정말 듣기 좋으라고 뱉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다리는 빨랐으나’ 라켓면을 공에 일정하게 맞추지도, 팔을 빼고 있다가 달려가 치지도 못했다. 기본기보다 흥미 위주의 강의를 진행했던 선생님 덕분에 스쿼시의 재미에 흠뻑 빠져들었으나 스윙은 중구난방이 되었다. 그에 비해 기본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지금의 선생님에게 배우는 회원들은 한두 달 차부터 군더더기 없이 공을 밀어치곤 했다.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도 강습 코트 밖에서 그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놀라움과 부러움이 동시에 밀려온다.


그럼에도 그들에겐 내가 더 소질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Every startup is an overnight success, but it happens on 500th night.”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 창업자 이승윤 대표에게 실리콘밸리 엔젤투자자 찰리 송허스트가 한 말이다. 6년의 시행착오 끝에 사업을 성공시킨 이 대표는 이 말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단다. 모든 스타트업이 밖에서 보기엔 하루아침에 성공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건 500번째 밤에 일어난다는 말. 어렸을 때 비슷한 다른 말도 참 좋아했었다. 우리가 보는 건 다른 사람이 활짝 꽃피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순간이지만 그 뒤엔 개화하기까지의 수많은 시간이 있다는 것. 다른 사람이 스포트라이트 받는 순간과 나의 어둠을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말 말이다.


래디쉬의 성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내게도 5년의 시간이 있었다. 한 주에 2번씩만 스쿼시를 치러 갔다고 쳐도 5년이면 대략 500번이다. 그중엔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팔과 허리가 아파 더이상 공을 칠 수 없을 때까지 연습한 날도 있었다. 서브가 안 돼 서브만 수백번씩 연습한 기간도 있다. 그들이 본 건 나의 500번째 스쿼시였다.


몇 달 전 회사 선배들과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스쿼시 얘기가 나왔다. 아직도 스쿼시를 치냐며 놀라던 선배들은 재능이 있나 보다고, 이제 잘 치겠다며 인사를 건네왔다. “재능은 크게 없는데 5년째 치고 있어요”라는 내 대답에 한 선배가 말했다. “5년째 치는 게 재능이야.”


생각해보면 포기하지 않고 5년째 치고 있는 게 진짜 재능일지도 모른다. 나의 500번째 밤에 아직 벼락같은 성공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순간 순간 한 계단을 오르듯 성장한 경험들이 생겼다. 오늘 잘 안 돼도 크게 낙담하지 않고 “하다보면 언젠가 되겠죠”라고 선생님에게 툭 한 마디 던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전 어느 날보다도 빡센 강습을 시키던 선생님이 가뿐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하는 나를 독려하며 말했다.


“재주 회원님은 포기가 없잖아요.”


그 힘든 와중에도 포기가 ‘없다’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회원님은 포기 안 하잖아요’라는 말과는 또다른 느낌. 나의 지겹도록 늘지 않는 500번째 시간을 옆에서 지켜봐온 선생님이기에 그렇게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500번째 스쿼시는 아마 나보다 더 훌륭할 것이다. 나 역시 나의 1000번째 스쿼시가 기대된다. 가닿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기회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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