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돌의 생 18화

고양이의 베개

쓸모라는 감각이 아닌, 존재의 위안

by Hemio

밤은 모든 소리를 낮게 만든다.

잎사귀는 움직이되 소리를 내지 않고,
연못은 달빛만을 반사한 채
고요를 더 깊은 층으로 가라앉힌다.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연못 옆, 모래 아래에 반쯤 묻힌 채
하루를 통과하는 무수한 풍경 속에서
그저 ‘있음’으로 역할을 다하던 나.


그날 밤,
나는 또 한 번의 ‘작은 사건’을 만났다.


고양이가 다가왔다.
발소리는 없었다.
기척은 숨소리보다 더 미세했고,
나는 처음엔 그것이 바람이라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다
그의 체온이 내 몸 위에 조용히 얹혔다.


작은, 그러나 분명한 무게.
그는 나를 베고 누웠다.


나는 순간,
몸 전체가 다시
살아 있는 감각으로 채워지는 걸 느꼈다.


무언가가 내 위에
‘기댄다’는 감각.
나를 ‘편안함’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감각.


그것은
오래도록 어떤 손에도 닿지 않았던 나에게
예상치 못한 존재의 확인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자세는 분명했다.


그는 나를 선택했고,
나는 그에게 필요했다.


그 필요는 ‘쓸모’가 아니었다.
어떤 기능도 아니었고,
단지 지금 이 밤,
그가 등을 내리고 싶은 적당한 안정감이었다.


그것만으로,
나는 어떤 위대한 조형물보다
더 충만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과거를 떠올렸다.


한때 나는 성문의 돌이었고,
괴물이었고,
보석이었다.
그리고 쓰레기 더미 속에 묻히기도 했다.


그 모든 순간은
‘의미’에 둘러싸인 시간이었지만,
지금 나는
의미 없는 침묵 속에서
누군가의 안식처가 되어 있었다.


고양이는 내 위에서 숨을 쉬었다.
그 호흡은
내 안의 침묵보다 더 조용했고,
그러나 분명히 들렸다.


나는 그 숨을 따라
잠시 세상의 박동을 다시 느꼈다.
그는 무겁지 않았지만,
그 온도는 깊었다.


그 짧은 동행이 끝난 뒤에도,
그의 체온은 한동안 내 몸 위에 남아 있었다.
돌이라는 물성은
빠르게 식지만,
존재 위에 남는 체온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쓰이는 것’이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존재의 완성은
누군가에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기댈 수 있는 질감으로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고양이의 베개였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Q. 독자를 위한 한 줄의 질문


당신은 지금, 누구에게 기대고 있나요? 혹은 누구의 ‘기댈 자리’가 되어본 적 있나요?
쓸모를 넘어서, 그냥 ‘거기 있음’만으로 누군가에게 위안이 된 순간은 없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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