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비면 바람이 더 잘 분다.
낙엽 밟히는 소리가 가슴에 산다.
처음에는 생소했던 것 같다.
가슴도 밟히고 있는 것 같아 종종 아프기도 했다.
그러다 들려왔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어 -
어느 계절에 더 심해지고 어느 해에 유난히 거슬리는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건 따분한 상념에 불과했다.
이상하리만치 늘 비슷한 톤으로 맴돌았다.
어둡고 칙칙하기만 했다면 차라리 해결하고자 노력했을까, 모르겠다.
그저 담담하고 건조하게 당연하다는 투로 고요히 흐르고 있어서 그걸 걷어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채도가 낮은 채로 세상을 보는 것이, 낮고 공허한 울림을 듣는 것이 어땠냐라고 묻는다면..
지금은 둘을 분리할 필요도 없고 한쪽을 걷어낼 필요도 없으니 그로 인해 특별히 피로하게 느껴질 이유도 없었다는 것이다.
버거우냐 힘드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나와 얼마나 잘 상생하고 있느냐의 문제로 변질되어 버렸다는 사실.
간혹 혼란스러웠을 때도 있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자각이 아니라 타인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을 때,
다들 그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럴 때 잠시 휘청거리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도 그저 그렇게 두는 수밖에 없었다.
살아가면서 여전히 비슷한 색채의 것들에 섞이고 그런 밀도의 공기에서 호흡이 자연스럽다.
친근하고 다정한 것들과는 다르게 그것들이 더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진다.
날카롭고 투박하고 상처받은 것들 속에서 용감해진다.
나는 태어나기를 염세주의자로 태어났다.
숙명처럼, 원죄처럼.
이제는 그 사실이 명확해졌고 거기에 반기를 들고 싶은 생각도 없다.
오히려 인정함으로 인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
하루를 살아내기보다 하루하루를 소멸시키며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책을 삼키듯 하루도 삼키고 다음은 버린다.
살아낸다는 것은 시작도 하기 전부터 힘이 들었다.
소멸시키는 것은 버리면 그만인 것이라 조금 가볍다.
나는 매일을 어떡하면 더 잘 버릴 수 있을지에 대해 몰두하게 되었다.
너무 고이게 두지 않고 잘 버리면서 가는 것, 그래서 비워지는 마음까지 기대하게 된다.
부정한 것들을 부정하지 않고 털어내면서 평온한 시간들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외면하려 했지만 외면하기 힘들었던 마음들 앞에 서서 비어내는 시간들을 즐기고 있다.
요즘 꽤 괜찮은 바람이 분다.
그래서인지 나는 매우 염세적이지만 제법 활달하게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