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바르셀로나 여행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문학동네, 2019, 51쪽)
사람은 서로를 믿으면 안 된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친구가 알람을 맞춰 놨을 거라고 믿는다던지, 내일도 친구는 시간 맞춰 일어날 거라고 확신한다던지, 예약 확인을 누군가는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던지. 이 모든 게 하루아침에 다 깨질 수도 있는 일이다. 사람은 이렇게나 허술하다.
가우디 투어를 예약한 날 아침, 우리 세 명은 아무도 알람을 듣지 못했다. 서로를 너무 믿었던 탓에 알람을 맞추지 않았거나 알람을 끄고 다시 잤거나 핸드폰이 꺼진 것이다. 평소 알람 없이 잘 일어나던 친구도 그날은 좀처럼 잠에서 깨지 못했다. 뭔가 불길한 느낌에 잠이 깬 친구가 가우디 투어 시작 십분 전임을 알려 주었고,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옷만 챙겨 입고 투어 장소로 뛰어갔다. 약속 시간보다 5분 정도 늦게 도착했는데, 다행히 아직 사람들이 몇 명 모여 있었다. 우린 쭈뼛쭈뼛 사람들 틈에 끼여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가이드가 다가오더니 자신의 투어를 예약한 사람들은 다 왔다며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다.
우리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다시 예약 내역을 찾아봤다. 그때 투어를 결제한 친구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동시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아무리 여행은 계획대로 안된다지만, 이렇게까지 막무가내일 줄이야. 아침부터 허겁지겁 나왔는데, 사실 투어는 진작에 취소되었다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투어를 취소해도 되는 건가? 그런데 왜 아무도 미리 예약 확인을 하지 않았던 거지? 애초에 알람은 왜 안 울린 거지? 아니, 어쨌든 우리 오늘 가우디 투어는 못 하는 거야?
일단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고, 당장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오늘이 아니면 가우디 투어를 할 수 있는 날은 없다. 지금 새로 예약하는 건 너무 늦었으니, 아까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곳에 그냥 끼자는 의견이 나왔다. 우리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지금 결제를 할 테니 함께 투어에 참여해도 되는지 물어봤다. 감사하게도 흔쾌히 환영해 주셔서 우리는 가우디 투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투어가 시작되기까지 약 삼십 분 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우린 잘 극복해냈다. 아무도 이성을 잃지 않았고 차분히 문제를 해결했다. 서로 잘못했다고 탓하지도 않았으며 재밌는 해프닝이라고 그저 웃어넘겼다. 다들 여행을 하도 많이 해서 그런지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타격이 없었다. 우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즐겁게 가우디가 지은 주택을, 공원을, 성당을 둘러보았다. 우리 여행처럼 역동적인 가우디의 상상력에 찬사를 보내기도 하고, 수도자처럼 살았던 그의 삶을 안쓰러워하기도 하고, 수많은 상징이 담긴 공원과 성당을 열심히 해석하기도 하면서 가우디의 삶을 곱씹었다.
즉흥적이었지만 그래서 더 즐거웠던 가우디 투어를 마치고 몬주익 언덕으로 향했다. 화려한 음악 분수쇼가 열린다기에 찾아갔는데, 우리가 갔던 시간엔 딱히 특별한 분수쇼를 하지는 않았다. 크고 강한 물줄기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대신 언덕 위로 올라가 해 지는 광경을 감상했다. 니스 해변에서도, 바르셀로네타 해변에서도 노을은 언제나 감동적이었지만, 몬주익 언덕에서 보았던 노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뜨거운 태양은 산 밑으로 내려가기 싫었는지 자신의 벌건 흔적을 하늘 곳곳에 남겼다. 태양과 가장 가까이 있던 양떼구름들은 주홍색으로 물들었고, 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동쪽의 하늘에는 옅은 분홍색 물감이 군데군데 덧칠해져 있었다. 태양이 미처 건드리지 못해서 아직 푸르른 곳은 이미 붉어진 구름들이 헤집어 놓는 탓에 형형색색이 펼쳐졌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아름다운 하늘을 눈에 다 담으려고 노력했다. 인간은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색의 향연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오늘 낮에 보았던 가우디의 건축물은 몬주익 언덕의 노을과는 정반대였다. 가우디는 철저하고 섬세한 설계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후대에도 기억될 작품을 완성했다. 우리는 가우디가 밤낮없이 고민했던 실험의 흔적을 알고 있고, 당시 누구도 생각 못했던 독특한 아이디어를 정교한 기술로 실현시켰다는 것에 찬사를 보낸다. 반면, 자연의 노을은 가우디의 노력마저도 허무하게 만들 만큼 순식간에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꾸준히 아름다운 작품 말이다.
가우디의 작품과 자연의 작품을 오늘 하루 모두 감상한 나는 그저 황홀했다. 무엇이 더 대단하고, 무엇이 더 아름다운지 겨룰 일이 아니었다. 내가 인간인 것에도 감사했고 자연의 섭리 안에 존재하는 것에도 기뻤다. 오늘은 아침부터 계획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서 더 인간의 무력함을 느끼고 가우디에게 감동받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수 있던 것 같다. 이제 마드리드만 가면 여행이 끝난다. 여행을 마무리할 때가 되어서야 여행에서만 맛볼 수 있는 기쁨을 알아챈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15일차 : 숙소 - 가우디 투어(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구엘 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 L'Arrosseria Xativa Sant Antoni - 몬주익 언덕 - Churreria Forn d'en Pau - Restaurant Bodega Joan - 숙소
16일차 : 숙소 - 바르셀로네타 해변 - O'Retorno - 바르셀로나 산츠역 - 마드리드 이동
- 여행 일정 -
프랑스 파리 5박 (12/24~12/29)
프랑스 니스 2박 (12/29~12/31)
이탈리아 베니스 1박 (12/31~1/1)
이탈리아 피렌체 3박 (1/1~1/4)
이탈리아 밀라노 2박 (1/4~1/6)
스페인 바르셀로나 3박 (1/6~1/9)
스페인 마드리드 2박 (1/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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