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마드리드, 톨레도 여행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 <맨 오브 라만차>, 돈키호테 뮤지컬 중 )
솔직히 말하면, 주변인들의 참견이 듣기 싫어서 마드리드를 갔다. 그들에게 틀렸다고 말해주려고 더 열심히 마드리드 여행 정보를 알아봤다. 그런데 정말로, 누가 마드리드 볼 거 없다고 그랬어?
우선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은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넓고 작품도 많았다. 물론 지루하지도 않았다. 프란시스코 고야, 후세페 데 리베라의 그림은 그 앞에 앉아 한참 해석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게 만들었고, 히에로니무스 보쉬와 피터 브뤼겔의 기괴하고 섬뜩한 그림은 나를 그 무서운 환상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듯했다. 라파엘로와 보티첼리의 그림을 보면서는 신을 찬양하는 내용임에도 다들 화가에게만 찬사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미술관에 갈 때마다 모은 엽서가 벌써 한참 쌓여 있어서 프라도 미술관은 가볍게 보고 나오려고 했는데, 그러기엔 재밌는 그림이 너무 많았다. 좀 더 시간이 많았다면 루브르 박물관처럼 프라도 미술관에도 하루 종일 있었을 것 같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나왔서는, 근처의 레티로 공원에 가야 한다. 스페인 특유의 맑고 높은 하늘과 푸르른 잔디, 찰랑이는 작은 호수, 그 위를 떠다니는 백색의 오리들과 작은 배, 그리고 공원 한 구석에 투명하게 빛나고 있는 수정궁. 호수 건너편의 벤치에 앉아 있으면 이 공원에 매일 산책하러 오는 마드리드 시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괜히 조깅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질투심을 느낀 순간이었다.
여유가 있다면, 또는 돈키호테를 좋아한다면, 마드리드 근교 소도시 '톨레도'에 가야 한다. 스페인의 대표 문학 <돈키호테>는 라 만차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톨레도가 바로 그 라 만차 지역에 속한다. 그래서 도시에는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기도 하고, 돈키호테와 산초의 그림이 붙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톨레도는 돈키호테뿐 아니라 역사 도시로 의미가 깊다. 마드리드가 수도가 되기 전, 약 1천 년 동안 스페인의 중심지였다는 톨레도는 아직도 중세시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로마 시대의 유적부터 이슬람, 그리스도교, 유대교 등 여러 종교의 유산까지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이다. 톨레도는 반나절이면 다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작다. 하지만, 도시를 걷는 것만으로 내가 꿈꾸던 환상 속으로 들어간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내가 지금껏 자라온 한국이라는 곳이 무척이나 좁은 공간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톨레도까지 다녀왔다면 여유롭게 마드리드 곳곳을 돌아다녀보자. 투우 행사와 종교재판이 열리기도 했던 마요르 광장, 그 옆에 다양한 타파스를 파는 산 미구엘 시장, 마드리드의 시그니처이기도 한 마드리드 왕궁, 도심에 우뚝 서 있는 고대 이집트 데보드 신전, 스페인에서 빠질 수 없는 쇼핑을 위해 자라(ZARA)까지 갔다 오면 마드리드를 충분히 둘러봤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다 즐기려면 2박 3일로는 한참 부족하다. 마스크를 쓰고 있기에는 아까운 맑은 날씨를 느끼다 보면 마드리드에서의 시간은 다른 곳에서보다 두 배로 빠르게 흐를 것이다.
마드리드는 수도답게 널찍한 도로와 큼지막한 쇼핑몰, 복작거리는 광장과 광활한 공원이 특징이다. 또한, 곳곳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음악가들이 많고, 벽에만 붙어 있기엔 아까운 그래피티도 자주 보인다. 정갈한 도시 사이에 숨어 있는 예술의 흔적은 마드리드에 발을 들인 순간 떠날 수 없게 옷자락을 꼭 붙잡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드리드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꿀대구였다. 달콤한 꿀과 토마토소스가 부드러운 대구 사이사이에 섞여 들어간 요리였다. 조그만 음식이라 금방 다 먹을 수 있었지만, 식사를 마치면 네덜란드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 최대한 천천히 먹었다. 한국이 아니라 네덜란드로 돌아간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지만, 그래도 3주 배낭여행이 끝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났다. 여행의 시작이었던 파리에서는 힘들었던 탓에 3주가 얼른 지나기를 바랐었는데,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부터는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다. 스페인에서는 다시 여행의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긴 여행으로 몸은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지만 그동안 쌓인 추억이 너무 많았고 배운 것도 많았다. 앞으로 이렇게 무모하고 즉흥적인 여행은 절대 없을 것이란 걸 알기에 이 시간들이 더 소중했다.
마지막으로 정리해보자면, 여행에 낭만은 없다. 한껏 꾸미고 나가면 거센 바람에 머리가 다 헝클어지고, 빗물에 옷이 다 망가지며 울퉁불퉁한 바닥 때문에 발은 퉁퉁 붓는다. 분위기를 내고 사진을 찍다 보면 소매치기당하기 쉽고 저렴한 숙소를 예약하면 그만큼 잠을 설쳐야 한다. 편한 여행을 하자고 돈을 쓰다 보면 여행 중간에 비상금을 꺼내야 하는 수가 있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화장품은 손도 대지 않게 되고 편안한 옷에만 손이 가게 된다.
그래도 나는 또 여행을 한다. 머릿속 상상처럼 여행이 아름답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또 상상을 한다. 다시 비행기 티켓을 찾아보고, 숙소를 고르고, 미술관 입장료를 알아본다.
여행에 낭만은 없지만 설렘은 있으니까. 여행에 낭만을 잃어도 추억은 많아지니까. 여행에 낭만을 바라지는 않아도 자유를 바랄 수는 있으니까. 그래서 여행은 즐겁고 여행은 필요하다.
다시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순간까지 나는 지난 여행의 사진첩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런 게 바로 여행이니까!
17일차 : 숙소 - 톨레도 - VINITUS GRAN VIA MADRID - 시벨레스궁 - 레티로 공원 - 수정궁 - 프라도 미술관 - 숙소
18일차 : 숙소 - 마요르 광장 - 비니투스 - 마드리드 공항 - 네덜란드 기숙사
- 여행 일정 -
프랑스 파리 5박 (12/24~12/29)
프랑스 니스 2박 (12/29~12/31)
이탈리아 베니스 1박 (12/31~1/1)
이탈리아 피렌체 3박 (1/1~1/4)
이탈리아 밀라노 2박 (1/4~1/6)
스페인 바르셀로나 3박 (1/6~1/9)
스페인 마드리드 2박 (1/9~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