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 중고 책방4.

by 래연






그 가을 몇 번은 더 갔는지 모른다. 추수되어 걸러진 햇빛이 내리쬐는 어느 일요일 내가 혜화동을 거니는 동안에도 청년은 이 모든 자연의 변화에서 면제되어 지하에 머물 것이었다. 열린 공간에서 바깥공기를 호흡할 때마다 나는, 그 공기에 동참하지 못하는 형편인 그를 떠올렸다.



나만 누린 그 공기들을 대강 문질러 주머니에 구겨 넣은 조약돌처럼 모아서는 어떤 저녁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정갈하고도 관능적인 그의 얼굴이 거기에서 나를 맞는다.


“아, 그때 레드북은 덕분에 곧장 샀어요.... 최근엔 인터넷 중고서점들을 뒤져서 찾고 싶던 시집을 하나 샀어요. 보시겠어요?”

바로 그날 도착한 시집이었다. <시의 혁명>, 아주 오래전 펜을 꺾어버린 젊은 시인의 젊은 시들의 흔적이었다. 이런 시집을 구할 수 있었던 건 요행이라고나 할 만한 일이었다. 그는 판본을 확인한다.

“이런 책이라면 한 십만 원 정도에도 충분히 거래되겠어요. 정말 구하기 어려운 건데.”

“오빠 고등학교 반 친구였어요. 고등학교 때 동인지 활동하면서 시집을 냈었죠. 그때 이 사람이 교지에 낸 시를 읽고는, 나는 시 같은 거 쓰지도 말아야겠다, 이런 열등감이 확 들었었지요. 학교는 거의 안 나오고 윤락가에서 살다시피 했대요. 교감한테 삿대질하며 대들어서 학교 잘릴 뻔하다가 동문 중 하나가 우리 학교에서 천재 하나를 졸업시켜야 한다며 말려서 겨우 학교는 졸업했다는......”

“그런 전설적인..... 그런데 어떻게 이런 시집을 구하셨어요? 되게 어려울 거 같은데.”

“쉽지 않긴 한데요, 혹시나 하고 여기저기 중고 온라인 검색창에 이름 두드려보다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그렇게 해주고 하다가 우연히 걸린 거예요. 장 콕토의 <무서운 아이들>이랑, 이런 식으로 얻은 게 몇 권 돼요.”

“아, 참을성을 갖고 하면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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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요새 이런저런 장이 많이 서나 봐요. 우연히 여러 군데 갔었어요. 도떼기 시장이랑 마르쉐랑, 물건들이 다른 데서 보기 힘든, 백화점에 나오는 것들도 아니고, 수제 빵이며 잼에 햄에...... 유럽의 장을 보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그런 기획에 참여한 적 있어요. 그게 워낙 요새 흐름이죠. 어차피 먹고살기 힘든 마당에 이왕 재미라도 있게 해 보자 이런 컨셉으로 뭉쳐 만드는 거예요.”

“고무적이군요. 그나저나 종일 지하에만 계시니 답답하진 않으세요?”

“사실 여기도....... 아까 낮에 운영진끼리 회의했었는데, 앞으로 여길 어떻게 존속시킬지를 두고요. 사실 답이 없어요. 물론 저는 회의에서 입을 다물고 있죠. 여기가 카페로 특화시키기에는 지하여서 메리트가 없는 데다, 그렇다고 책이 메리트가 되기에는 또...... 여기서 제가 하는 일이 서적 담당인데, 정말 좋은 책 찾는 분들에게 쓸모 있으려면, 저 서고 보이시죠? 저 애매한 책들부터 다 들어내고 제대로 된 인문서로 채워야 하는데, 저에게 모든 권한이 있다면 말이죠.”



문득 초가을의 한기가 지하까지 감도는 듯도 싶다. 손님이 없어 한가한 김에 그는 편하게 말을 이어간다.

“하루 종일 책을 읽는데 너무 읽어서 머리가 아플 만큼이에요. 저도 제가 왜 이렇게 읽는지 모를 지경이에요....... 예전에는 가능한 한 많이 읽고 쓰고 살 궁리를 하느라 중장비 자격증을 따기도 했는데, 막상 그 길로 나가면 몸이 너무 고되어져 읽고 쓸 여력이 안 되는 거 같아서 그만뒀죠. 어쩌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네요. 그러고 보니 이야기라는 거 자체를 정말 오랜만에 해보네요.”

이렇게 말하는 그의 고개의 각도가 진지하다.



“책, 서고와 함께 하는 삶이라..... 생일이 가을 무렵인가요? 혹 9월쯤?”

“예, 처녀자리예요.”

천하잖아요, 없는 데도 있는 척하는 거 천하잖아요, 그의 이 말이 잊히기는커녕 내 뇌리를 점점 더 파고들었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 그 말은 마치, 나는 처녀자리예요의 다른 표현 같았던 것이다. 모두가 이미 익숙하게 동의해버린 풍토에 새삼 침을 확 뱉어 버리는 듯한 그 반응이란, 무결을 지향하는 그의 혼을 순간적으로 드러낸 것 같기만 했다.



“그런데 책 찾으시는 취향이...... 요새 젊은 애들은 이런 거 안 읽어요. 좀 겉멋 같은 것도 있어서 지젝이 유행하면 지젝 끼고 다니고 이런 식이죠.”

“막상 글 쓰는 걸 전공으로 배우는 게 딱히, 은근 도움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문창과 나온 친구한테서요. 하지 말아야 할 규칙 같은 것들이 입력되어 버린다나......”

“그걸 그렇다고 인정하면 그래도 양호한 거예요. 그걸 인정하기는커녕 자기가 배운 게 표준인양 자부심에 차 있는 녀석들도 많아요. 막상 요새 글 쓴다 하는 친구들 도스토예프스키라던가 안 읽는 경우도 많고, 분위기가 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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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매니저가 들어왔다. 미대 출신의 눈썹이 진한 이 남자는 이 카페의 큐레이터이기도 하다. 서고와 벽을 이용하여 전시를 열고 전시 작가와의 대화도 주관한다. 때로 그 자신이 고객들을 그려주기도 한다. 처음 갈 때부터 몇 마디 대화를 나눠온 사이였으므로 나는 또 그에게 아는 척을 한다. 그는 대놓고 이 카페의 얼굴처럼, 내가 여기 처음 가면서부터 한동안은 이 공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매니저는 움직이고, 청년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나는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일어난다. 내가 일어나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이날의 일과를 파할 카페의 공기를 상상하기가 싫어, 문 닫을 시간으로부터는 멀찌감치, 가급적 일찌감치. 거기 한 줌 남겨둔 나의 온기가 서서히 자연스럽게 식어갈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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