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던 바와는 달리 이 마지막 학기에 테오도라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미츠요도 그녀가 바뀌었다고 했다. 테오도라는 디스크 수술 후 통증이 수시로 재발했는데 이런 문제도 그녀를 변하게 했는지 모른다. 심지어 엠마 및 엠마 수업은 여러 장점을 갖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좋은 건, 숙제의 양이 적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역시 프랑스 정치 토론에 바쳐진 매주 월요일 오후 두 시간만큼은 버거웠다. 토론을 하자면 먼저 정치 주역들을 알아야 했기에 테오도라는 첫 시간에 빌르팽이니 마리 르 펜이니 하는 인물들의 사진과 그들의 정치 소속을 정리한 프린트를 나눠 준 다음 하나하나 주석을 달았다. 한 명 한 명 넘어갈 때마다 “이 작자는 좀 전에 설명한 자보다 더욱 나쁘고....”라는 멘트를 이어갔다.
또 우리는 르뷔 드 프레스Revue de presse(신문 기사 발표하기)를 의무적으로 해야 했다. 각자 자기 나라, 프랑스, 국제사회 관련, 이 세 가지 기사를 연달아 이야기해야 했다. 나는 주제 선정을 위해 호시탐탐 르몽드나 리베라시옹 등의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발표에서 천안함과 북한을 일부 언급했고 이 여파로 심지어 같은 반 릴리는 북한에 대해 검색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자신이 북한에 가 있어 아주 무서웠다고 했다.
나는 프랑스에 체류하는 동안, 한 개인이 나라 전체의 심각한 상황에 노출되어 살아온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삶 전반과 일상을 대하는 태도에 어떤 차이를 빚는지를 피부로 느꼈다. 식민의 역사와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나라의 여자는, 정복자의 나라에서 씩씩하게 성장하여 각종 레포츠와 파티를 즐기는 나라의 딸들과는 완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자의식에 지레 주눅 들어 표현력이 수시로 제한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월요일 오후는 동양계 학생들에게는 가장 참여율이 저조한 수업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침묵했고 남미나 영국 친구들은 정치적 주제에 대해 신나서 떠들어댔다.
그래도 테오도라는 짓궂음 뒤에 다른 일면들을 감추고 있었다. 과자나 케이크를 썩 잘 만드는가 하면 원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테오도라는 “정원 가꾸는 건 그 결과를 금방 볼 수 있어서 아이처럼 놀라고 즐거워하게 되지.”라며 예찬했다. 그녀는 사실 심술궂다기보다는 늘 장난칠 궁리를 하는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보였다. 테오는 기분파지만 사리는 분명했고 나름 속정도 있었다. 내가 좀 더 사교적이었다면 테오도라와 훨씬 재미있게 지낼 수도 있었을 거다.
그녀가 딱 한 번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사실 그것은 분노도 폭발도 아니었다. 화근은 영국 남자애들이었다. 알렉스, 크리스, 스티브 이 세 아이는 초반에는 꼬박꼬박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 4월 말경부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결석하기 시작하여 마치 서로 짠 듯이 교대로 띄엄띄엄 나오다가 5월 중순 이후까지 약 3주 정도는 아예 셋 다 일제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들은 모든 수업에 부재했다. 슈네이드에게 듣기를, 크리스나 스티브는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은 채 게임에 빠져 산다고 했다.
그러던 그들이 어느 날 일제히 호출되어 수업에 들어왔다. 테오도라는 처음으로 호되게 나무랐다. 꽤 살벌해지는 통에 우리 모두는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크리스 등의 야단맞는 태도는 말이 아녔다. 테오도라가 “4월 20일 이후 너희들을 보지 못했다.”고 나무라자 크리스는 그냥 “잘못 했습니다.”라고 하기는커녕 여전히 버텼다. “그렇게 많이 빠지지는 않았을 텐데요.”라며 선생님의 셈이 틀렸다고 주장했다.
테오도라는 이 소년들의 기에 전혀 눌리지 않고 움찔할 정도로 호된 소리를 해서 잠시 다들(문제의 소년들만 빼고) 긴장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날 오후 수업에서 테오도라는 스스로 야단쳤던 알렉스들과 더불어 낄낄대고 있었던 거다. 이후 문제의 세 소년은 눈치껏 다시 빠지기 시작했다. 구제 불능이었다.
“우리 수업이 갈수록 포 드 샤그렝(소원 가죽 주머니)이 되어가고 있어.”
수업 참여율이 좋았던 초반이 지나고 점점 인원이 줄어들어 가자 테오도라는 어느 날 수업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푸념했다. 우리가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자 테오도라는 이는 발자크의 소설 제목으로서, 이 나귀 가죽을 갖고 소원을 빌면 무어든 다 이루어지지만, 욕망이 실현되는 동시에 점점 가죽이 오그라들면서 소유자의 수명 또한 단축된다고 했다. 섬뜩한 주머니다. 나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가죽이 결코 줄지 않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