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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Aug 02. 2024

행복은 용접되었다




    시간이 휙휙 흘러가 떠나는 아침이 되고 말았다. 떠나기 전에 짐을 정리해야 했다. 유학생의 짐이란 마지막 순간에 세 가지로 나뉜다. 부치는 짐, 가지고 떠나는 짐, 누군가에게 물려주는 짐. 다예에게는 사전을, 에리나에게는 침낭을, 영아에게는 밥솥을 각각 물려주었다. 그 외, 양념과 요리 재료, 그동안 저금한 동전들도 처리해야 했는데 마침 며칠 전 달라는 친구가 있었다. “누나, 저 다 주세요. 저는 뭐 하나 있는 게 없어요.”


    떠나는 날 아침 짐들을 바리바리 들고 학교 기숙사 사무실까지 갔다. 날은 더워서 모든 짐들로 인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무실에서 보증금을 돌려받은 다음, 물건 건네기로 한 친구를 기다렸다. 그는 채 졸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나타나 좀 시큰둥하게 짐들을 검열하더니만 전기주전자와 전 뒤지개처럼 실속 있어 보이는 것만을 엄선하여 챙겼다. 그의 간택에서 제외된 나머지 물건들을 모두 휴지통에 처박고 나서 카우타르의 사무실에 갔다. 그녀 앞 화병에는 커다란 해바라기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그녀를 꼭 닮은 꽃이었다. 또 몇몇 선생님, 세실, 밀레나, 테오도라 등을 보았다. 이들과 마지막 인사를 마친 다음, 그토록 익숙했던 나무 아래 돌의자에서 잠시, 떠나기 전 마지막 그늘을 들이마셨다.



    마침 맘 좋은 아르헨티나 친구 파블로가 자기 차로 공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연락해왔다. 그런데 비행기 시간은 오후였고 파블로가 오기까지 아직 두어 시간은 남아 있었다. 건물 앞에 이시도라가 보였다. 그녀는 발목까지 오는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여태까지 본 모습 중 가장 우아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내게 한 마디 표현을 가르쳐 주었다. “프랑스인들이 작별할 때 뭐라고 하는지 알아?”

    “뭔데?”

    “메르드Merde!"(똥)

    운을 빌어주는 말이라고 했다. 똥은 문화를 막론하고 행운의 상징인 것인지. 우리는 서로에게 ‘똥’을 빌어주면서 웃으며 작별했다.


    이제 딱, 점심 식사할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남은 시간은 에리나와 보냈다. 마지막 학기에 우린 서로 뜸했었다. 그녀는 그사이 우리 기숙사를 떠나 학교 근처 말레이시아 친구의 빈 집을 빌려 쓰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그리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저울이 있어 공항에서 잴 짐의 무게를 미리 달아 볼 수도 있었고 간단히 씻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에리나는 다정한 손길로 점심을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그동안의 변화를 털어놓았다. 그녀는 사랑에 빠졌었다. 하지만 상대도 유학생이라 어차피 헤어져야 하기에 미리 서로 감정을 절제하려 애썼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힘들었단다. 그리고 에리나는 며칠 전 내가 잔디밭 위 피크닉 때 처음 알게 된 막심이란 친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 친구는 팜 파탈 같은 중국인 여자 친구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하다고 했다. 에리나는 막심과 가끔 점심을 먹으면서 마음고생하는 사람들끼리 위로하며 지낸다고 했다. 






    에리나가 해 준 밥은 이를테면 말레이시아 가정식이었다. 그녀는 밥솥에 밥을 얹고는 팬에 간장, 설탕과 갖은 향료를 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익숙한 솜씨로 생선과 달걀을 튀긴 다음 접시에 밥과 함께 올리고 달달한 간장 소스를 끼얹었다. 베란다에서 에리나는 엄마 같은 모습으로 밥을 퍼주었다. 파라솔로 살짝 가려진 포의 정오 햇살 아래 마지막 식사. 간소한 최후의 만찬이었다.


    그러고서 어떻게 에리나와 마지막 비주를 나누었는지 그녀의 미소는 어떠했는지 기억이 없다. 그만큼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월요일임에도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9개월 만의 관성에서 처음으로 밀려난 듯 낯설 뿐, 마치 나는 영원히 이곳에 살 것만 같았다. 파블로가 차를 몰고 나타나 공항으로 태워 갈 때까지도, 파블로 로시오 부부와 함께 공항의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마지막 비주를 나누는 순간까지도 떠남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내 심장이 태양과 처음 만났던 포를 뒤로 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은 채,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현실로 돌아간다. 내가 품고 산 유년이 저기 있다. 그것은 9개월이었다가 하루가 되고 그 한나절은 다시 찰나가 되어 멀어진다. 비행기가 떠오르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 찾아왔다. 마치 그간 꿈을 꾸다가 문득 슬며시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비행기에서 나는 마지막 일기를 적는다. 삶이라는 연습장에 실망이 적히지 않은 드문 페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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