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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원준 May 30. 2019

아이가 더 이상 안아달라고 하지 않는다

2주 전 주말, 오랜만에 첫째와 단 둘이 외출을 했다. 원래는 고향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친구 중 한 명에게 사정이 생겨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약속을 접었다.

덕분에 아내의 자유시간도 무산됐다. 내 친구들이 예정대로 집에 놀러 왔더라면 아내는 오랜만에 밖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올 수 있었을 텐데, 아내 입장에선 많이 아쉬웠을 것이다.


그게 미안해서 애써 첫째와 나가려고 한 것도 있었다. 오랜만에 아이와 좀 놀아주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아내에게 한숨 돌릴 시간을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 봤자 둘째 돌보고 집안일까지 하느라 많이 쉬지는 못하겠지만.)




비가 왔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작은 키즈카페에 가려고 했는데 날씨를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차를 타고 예전에 살던 집 근처에 있는 다른 키즈카페에 가기로 했다. 그 일대는 대형마트, 식당이 밀집해 있어 설렁설렁 실내 나들이 가기에도 좋은 지역이었다.

다만 첫째가 계속 안아달라고 할까 봐 걱정이었다. 아내에겐 그러지 않는데 나와 같이 어딜 갈 때면 제 발로 걸어가는 일이 없었다. 어지간 해선 그냥 안아주는데, 최근 아이의 몸무게가 15kg에 육박하게 되면서 오래 안고 있는 게 힘들어졌다. 요즘은 조금만 안고 걸어가도 팔이 후들후들한다. 몸이 힘든 것도 그렇지만, 이러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안고 다녀야 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날은 아이가 안아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집을 나서면서부터 차에 오를 때까지, 그리고 주차장에 도착해 키즈카페에 갈 때까지. 나와 외출할 때면 항상 노래를 부르던 “아빠 안아줘”라는 얘기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안아달라'는 투정이 그칠 기미가 보였던 건 며칠 전부터였다. 요 근래에 출근 시간이 조금 늦어지면서 첫째 어린이집 등원을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아이가 안아 달라고 했을 때 두어 번 정도 군말 없이 안아주다가 문득, 앞에서 엄마 또는 할머니 손을 잡고 걸어서 등원하는 아이들을 보고 첫째에게 말했었다.

“어? 저기 앞에 봐봐. 저 친구는 엄마 손잡고 잘 가네, 그치?”
“응.”
“너도 이제 아빠 손잡고 걸어가야 돼~ 이제 형님 됐으니까~”
“아니야, 싫어.”
“그래? 알았어. 그럼 동생한테 누나라고 안 불러도 된다고 얘기해줘야겠다. 아빠가 계속 안아주고 가면~ 누나 못돼~”
“... 아니야. 나 걸어갈 거야.”
“아냐, 괜찮아~ 아빠가 안아줄게~ 아직 애기라서 아빠가 안아주고 가야 할 것 같아.”
“싫어. 아빠 손, 아빠 손~”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변화를 싫어하는 첫째를, 그나마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나름의 요령이다. 스리슬쩍 아이를 ‘도발’하는 것.

생각해보니 이날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오히려 이제 내가 먼저 안아주겠다고 얘기하면 아이가 거절한다. 혼자 갈 수 있다고, 씩씩한 발걸음으로 걸어간다. 아이와 둘이 외출했던 날에는, 꽤 긴 거리를 단 한 번도 안아달라는 소리 없이 잘 걸어 다녔다.

기특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아이가 또 이렇게 훌쩍 커버렸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두세 살 아이일 때의 모습으로 계속 눈 앞에 두고 싶은데, 생각보다 아이가 더 빨리 자라는 것 같아서다.

예전에 브런치에 그런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첫째가 안아달라고 동네방네 다 들리게 소리를 지르며 떼를 쓴 적이 있었는데, 그날 있었던 일과 당시 나의 감정을 편지 형식으로 쓴 글이었다.


https://brunch.co.kr/@heopd/39


글에도 썼지만, 그날 나는 아이가 떼쓰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아 끝까지 받아주지 않았다. 사람들도 비슷한 일을 많이 겪었던 건지 글 조회수가 꽤 높았고 댓글도 평소보다 많이 달렸다. 그런데 댓글 내용이 좋지만은 않았다. 보통 육아 글을 올리면 긍정적 반응이 많은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댓글을 통해 이렇게 얘기했다.

“안아줄 수 있을 때 많이 안아주세요.”

이때까지만 해도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겁고 힘들기만 한데, 그럴 수 있을 때 많이 안아주라니. 그런 댓글을 처음 봤을 때는 별로 공감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아이가 커갈수록 내 품에서 조금씩 멀어진다는 느낌. 부모들은 그게 아쉬운 게 아닐까.

첫째가 ‘안아주기’를 완전히 뗐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또 어디 가면 “안아줘, 안아줘” 노래를 부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안아줄 것 같다.

어깨와 허리가 뻐근해도 어쩌겠나. '오늘'의 아이는, 앞으로 내가 마주하게 될 모습들 중에 가장 어린 '꼬맹이'인 것을. 아이에게 내가 필요할 땐 꼭 안아주고, 그 순간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도록 눈에 많이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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