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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Apr 10. 2018

9화 자존감 옆에 누가 앉았나



서점에 가보면 선반에서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을 셋 걸러 하나쯤 만날 수 있다.

이토록 애용되는 심리학 용어가 또 있을까. 마케팅적으로도  요긴하게 쓰이고 있지만 

그 덕분인지 뭔지 일상적으로도 참 많이 쓴다.

사람들은 당당해 보이는 누군가에게 “자존감이 높아 보인다”며 칭찬하기도 하고 

“자존감이 낮아서 그렇다”라는 설명으로 우울한 성격의 근거를 대기도 한다.


자존감은 높거나 낮은 그런 이분법적인 친구인 것인가. 딱 그 두 가지 상태만 있는?

 

굳이 두 상태 중 하나로 표현하자면 나의 경우는 자존감이 낮은 인간이다.

내가 나 자신을 특별히 긍정하는 일은 웬만해선 잘 일어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만한 낙천성도 부족하다.

여러 해를 보고 살았지만 아직도 거울을 보는 일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고,

장점보다는 단점을 찾아내는 것에 민첩하다. 상처에 대한 회복 탄력성도 떨어지는 편이라

누가 폭 찌르면 나는 푹 패여버린다. 그리고 푹 패인 자리는 더디게 원상 복구된다.



이런 그늘진 인간이지만 매 순간 괴로운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이 정도면 나도 쓸 만하고, 살 만하다’ 싶은 날들도 있고

 ‘나같은 인간은 정말이지……’ 하며 울적한 날도 있다.

또 아주 가끔은 ‘나 정도면 꽤 괜찮지!’ 하며 자존감이 대기권을 벗어나는 날들도 생긴다.


하지만 대부분의 날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다.


자존감으로 인해 생긴 그늘을 무시하거나 미처 모르고 지나갈 때가 많기 때문이다.

유독 자존감으로 고생하는 날엔, 굳이 현미경으로 그 그늘을 쳐다보며 우울해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존감은 여기 그대로인데 어떤 날은 무시하고 어떤 날은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심지어 자존감이 높지 않다는 사실이 즐거운 날들도 있다.


농담의 소재로 언제든 쓸 수 있는 나 자신이 있으니 누구를 만나도 농담의 샘이 마르지 않는다.

자조적인 농담을 주고받으며 상황을 극복하기도 하니까 자존감이 높지 않다는 것은 

의외로 즐거운 일이 된다. 내 자존감이 저기 달에 걸려 있었다면 이런 농담들은 재미있지도,

생각이 나지도 않았겠지.


자존감이라는 것, 이쯤 되면 도대체 높고 낮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을 정도로

이랬다 저랬다 기분을 변덕스럽게 한다.


나는 정말 자존감이 낮은 사람인가?


낮은 자존감을 가지면 불행하다고들 하는데 나는 불행한가? 잘 모르겠다. 그게 어떤 모양이고 크기가 어떻든 간에 자신 안에 오도카니 그냥 앉아 있는 것은 확실히 알 것 같다. 내 속에 앉아 있으니 꺼내어 명백히 볼 수도 없다. 그냥 느낄 뿐이다.

우리가 심장 박동을 느끼지만 심장의 모양을 볼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내안의 그 친구 옆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 때로는 자존감에 짙은 그늘이 드리우기도 하고 때로는 볕을 따사로이 쬐기도 한다.

 

예전엔 자존감이 시소에 타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내 앞에 앉느냐에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노릇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 자존감은 그리 쉽게 올라가거나 내려간 적이 없다.

그냥 이대로 있었고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나는 모른다. 그냥 내 안에 앉아 있는데 무지막지한 녀석이 성큼성큼 내 자존감 옆에 앉으면 나를 비추던 볕이 가려졌다가 그 녀석이 가고 나면 다시 볕이 든다. 내 자존감보다도 작고 귀여운 녀석이 와서 앉으면 볕은 그대로 들고 맞닿은 부분이 더 따뜻하게도 느껴진다.

 

그래서 이제는 자존감이 높은지 낮은지 따지지 말자는 마음이다. 우리는 자존감을 시소에 태운 적이 없다. 자존감 옆에 앉은 녀석이 내 볕을 다 가려도 녀석이 떠나고 나면 다시 볕은 든다. 사람마다 심장 모양이 다르고 각기 다른 박자로 움직이지만 매일 우리 안에서 펌프질하듯, 우리의 자존감도 각자 다르게 생겼지만 우리 안에서 각자의 리듬으로 살고 있다. 그게 무슨 모양인지 명백히 알 수도 없는데 지레짐작해서 미리 의기소침할 일도 아니다. 심장이 못생겼다고 불평하지 않고 열일해주어 그저 고맙다 생각하듯이 자존감이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해버리자. 누가 옆에 앉았느냐에 따라 응달에 놓였다가 양달에 놓였다가 하는 것이니까.



시소에 태우지도, 널뛰게 할 필요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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