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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Apr 11. 2023

19. 부적

첫 번째 풀코스를 완주하며

* 이 글은 2022년 11월에 쓴 글입니다.



꼭 완주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오늘은 나의 부적이 될 것이기 때문에.



지난 한 달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러닝을 시작하고 마라톤을 한 게 다행이다 싶었다. 내가 러닝을 시작한 이유는 그 어떤 심리적,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이 와도 다시는 쓰러지지 않는 나를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일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이런 게 사기를 당한다는 건가 싶을 정도로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으로 출렁였고 근 3일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눈이 충혈되고 입술이 터지고, 산책하고 러닝을 할 때마다 울었지만 - 이번의 나는 쓰러지지 않았다. 4일째부터는 잠을 잘 잤다. 내 할 일을 다 했다. 제 시간에 일어나고, 일을 하고, 운동을 하고, (몇몇 친구들을 괴롭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을 만났다. 책을 무려 20권이나 읽었고 작년부터 미뤘던 일들을 모두 처리했다.




그리고 나 자신과 오랜만에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 걸까. 그러자 몰랐던 것을 알았다. 회피했던 것을 마주했다. 나의 문제를 알았다. 그래서 해결했다. 신기하고 놀랍게도, 바로 해결이 되었다. 그리고 행복해졌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진심으로 다행이라 느껴졌고, 모든 게 나를 위해 일어났다는 믿음마저 생겨 버렸다. 삶은 진정 이어져 있다는 말도 이제는 이해 되었다. 그러자 상대방에게도 행복을 빌어줄 수 있었다. 이제 내 몫은 끝났다. 남은 건 세상이 알아서 할터였다. 나는 나의 길을 간다. 사랑스럽고 멋지고 섹시한 사람들과 함께.




2022년 11월 6일, 새벽 4시 알람을 7개나 맞춰놓고 첫 번째 알람이 울리지마자 바로 잠에서 깼다. 갑자기 바뀐 풀코스 노선으로 인해 집에서 상암월드컵경기장까지 가려면 지하철 첫 차를 타야만 했다. 요즘은 침대에 눕자마자 5분 안에 잠들어 버리기 때문에 전날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4시에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하고 가방 안에 바나나 2개와 물, 근육 마사지 크림, 카드와 핸드폰 그리고 물품 보관용 플라스틱백만 챙기고 나왔다.



5시 5분에 오는 첫 차를 10분간 기다리면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이미 지하철을 기다리는 벤치에는 앉을 곳이 없었다. 일요일 아침에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다니 다시 한번 반성을 하게 되었다. 나는 마라톤을 시작한 지난 5년간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았나. 건강, 시간, 돈. 평정심과 관계. 이 5가지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제대로 골고루 이 모든 것을 잘 살피고 살았나 싶었다. 특히 시간. 시간을 왜 그렇게 함부로 대하고 살았을까. 시간이 아깝다. 왜 그런 일들과 그런 사람들한테 내 소중한 시간을 나누어 줬을까.



첫 차가 들어왔다. 어디에도 오늘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20분 뒤 노선을 갈아타자마자 우르르, 나와 같은 마라톤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는 피로가, 누구에게는 걱정이, 누구에게는 흥분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이전 마라톤 참가에서는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행복. 사랑. 기쁨. 평화. 감사. 이번에도 혼자 참가하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였다.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득한 상암월드컵 경기장이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있을 곳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건강하고 좋은 사람들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듬뿍 받으며 오전 7시 43분에 출발했다. 행복했다. 오늘 나의 목표는 완주. 완주만 하면 된다. 나의 첫번째 풀코스 완주가 오늘 이루어질 것이다.



자, 출발.




...20km까지 가서야 내가 스트레칭도 안하고 운동화 끈도 제대로 묶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냥 뛰었다. 페이스m메이커 분들이 대부분 50, 60대 인 것을 보며 고무되었고, 나이가 드는 것이 기대되었다. 시각 장애인 분들과 팔에 끈을 묶고 뛰는 모습을 보며 나도 어서 체력을 더 키워서 다음 마라톤에는 시각 장애인 분들의 페이스 메이커가 되고 싶다는 꿈과 목표도 세웠다. 메디컬 가방을 메고 뛰는 분들을 보며 멋있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렇게 계속 23km 지점까지 평소 뛰는 것처럼 쉬엄쉬엄 뛰었다. 그제서야 몸이 풀리기 시작해 23km부터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제가 발생했다.



일반적으로 풀마라톤은 38km가 고비라고 하는데, 내 고비는 정확히 33km 지점에 왔다. 33km ~36km부터 무릎이 아프고 허벅지 근육에 눈살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멈춰서 근육을 푸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메디컬 가방을 멘 분들의 스프레이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계속 뛰었다. 제자리걸음 속도였지만 어쨌든 걷지는 않았다.



정신이 번쩍 든 건 갑자기 옆에 등장한 차량과 함께 도로 앞에 배치된 "여기서부터는 제한 시간 마감이니 이송 버스에 타십시오"라는 사인을 보고 나서였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를 제외한 주변 모든 사람들이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근육통으로 러닝 속도가 걷는 속도에 가깝다 보니 인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해서 300~400명을 제쳤다. 안돼. 이송 버스는 안돼. 나는 오늘 반드시 마라톤을 완주해야 해. 오늘은 반드시 풀코스를 완주해야 해. 오늘은 반드시 시간 안에 저 피니쉬 라인을 지나갈거야. 왜냐하면 오늘은 나의 부적이 될테니까. 속도를 냈다. 아픈 곳은 없었다. 나는 그 어느때보다 씩씩했고, 강했다.



완주. 42.195km를 완주했다. 시간은 5시간 4분. 허벅지 근육과 왼쪽 무릎이 쓰라리기는 했지만 피곤하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저 편안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일어난 것 같았다. 평화로웠다. 행복했다. 기뻤다. 충만했다.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평온했다.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옳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확신과 안정감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 나는 내 길을 잘 가고 있다. 이제는 알겠다. 확신이 든다. 나는 내 길을 잘 가고 있구나. 나는 잘 살고 있구나.




살아 있어서 기쁘다.

살아 있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사랑이 어디 있냐고 늘 묻고 다녔는데 그 사랑이 여기 있구나. 오늘 나는 사랑을 받았고 사랑을 느꼈고 사랑과 함께 뛰었다. 살아있는 것이 이처럼 행복한 일이라니. 이렇게 설레고 벅차는 일이라니.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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