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요가원이 이사 왔을 때 따라왔던 사람은 나뿐. 선생님과 마주 보며 단 둘이 요가를 한다는 것에 부담감이 있었지만 요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었나 보다.
그 뒤로 한 명 또는 두 명의 회원이 더 들고 났으나 꽤 오랜 기간 남은 것은 나 혼자이다.
그래서 애초에 일대일 요가가 아닌 이 요가 수업을 선생님과 독대하며 한 날들이 더 많다.
비 올 기운이 잔뜩 느껴지던 수분을 가졌던 저녁의 무거운 공기는 요 며칠 온도와 달리 제법 시원하게 느껴졌다.
하여 요가원에 들어서자마자 덥다는 느낌보다 더 강한 것은 머물렀던 공기들의 둔탁함이었다.
조심스레 밖이 엄청 시원하다고 말을 건네니 차소리가 엄청 시끄러울 텐데 망설이시며 창을 여셨다.
과연 차소리가 엄청 컸다. 이 정도로 크다고? 하고 속으로 깜짝 놀랄 만큼. 이제 와서 다시 닫을까요? 청하기는 민망하여 도로변에 있는 기분으로 요가를 하였다. 그러나 공기는 한결 청량했다. 간간히 오토바이가 들리면 오토바이 소리만 없다면 한결 나을 텐데, 그런데 공기는 시원하다 따위의 생각을 이으며 선생님이 읊는 동작을 따라 하였다.
선생님은 내가 집중을 잘한다고 칭찬하시지만 아마 내 머릿속을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다. 요가 시간은 마음 놓고 생각이 달음질치는 시간이다.
요가의 끝 사바아사나
"밖에 있는 내 마음을 내 몸으로 가지고 오세요."라고 나지막이 말하는 선생님 말씀에 순간 눈물이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 길게는 아니고 아주 짧게.
오늘만 들은 말이 아닌데, 차소리 덕분에 내 마음이 더욱 밖에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느껴서일까. 내 마음인데 내 몸 안에 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더듬어본다.
얼마 전 김민식 피디의 영상을 보고 인상적이라 생각한 부분이 있다. 마음을 몸에 두는 것, 그것이 존재감이 있는 것이라고. 무슨 일이든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이 다른 곳에 있다면 그것은 껍데기만 있는 것에 다름없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사람의 단단한 눈빛은 다르다.
이십 년도 더 전에 내 눈빛에 대해 말해주었던 이의 말이 떠오른다. 다른 어떤 말보다 눈빛을 알아차려준 말이 좋았다. 그것은 나를 알고서 한 말이므로. 나의 겉이 아닌, 나의 안을.
눈빛을 지키고 있는가.
문득 두렵다 생각이 들다가,
다른 빛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조해 본다. 탁해지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빛은 괜찮아.
탁해지지는 말아야겠다 다짐하며 내 몸에 내 마음을 가져오는 것을 잊지 말아야지 되뇐다. 종일은 안되더라도 종종이라도. 종종이 어려우면 문득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