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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렙백수 윤준혁 Jun 28. 2019

나는 퇴물 전자사전입니다.

#백수가되기로결심했습니다 #백수생활 #백수공부 #본업이백수입니다만


  내게도 짧지만 취업을 위해 노력을 했던 시간이 있었다. 21살쯤이었나? 군대를 가기 위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군면제가 나와버렸다.(나와버렸다는 당시에 원치 않았다는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한 장병이 위암 말기로 전역해 하늘로 간 뒤 나와 같은 병력이 있는 사람들은 당시에 거의 모두 면제였고 이후에 유명 연예인의 병역기피 사건이나 체대생들의 어깨 탈골을 통한 병역기피 문제 때문에 신체검사가 다시 강화되었다. 누군가에겐 '신의 아들'로 불리며 축하받을 일이었겠지만 '군대를 못 가게 되면 공무원이나 회사생활에서도 호봉이 낮아지는 거 아닌가?'를 먼저 걱정했었고 주어진 때에 주어진 상황을 만나는 무난한 삶을 살고 싶었던 나에게는 이런 변수가 가히 날벼락이었다. 군대를 다녀와서 평범히 학교를 다니다 취업에 성공해 회사를 다니고 싶었던 청년에게 사회로의 월반이 2년이나 당겨진 것이다.

  그래 2년 먼저 일을 하고 있으면 될 일이 아닌가? 그래서 21살의 남은 날들은 군대에 갈 친구들과 함께 보내고 22살부터 취업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취업에 대해 누군가의 조언을 들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스펙을 쌓고 자소서를 써서 취업을 하면 되는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취업에 뛰어들었다.

  경영학을 전공했던 나는 은행원을 목표로 취업을 준비했다. 서류전형에서 몇 번 떨어질 때만 하더라도 단지 어린 나이에 경력이 부족하거나 토익 점수가 좀 낮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별로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학교 다니는 동안 대외활동 많이 하고 도서관에 좀 박혀서 열심히 공부하면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이 원하는 것은 노력해서 채워질 것들을 원하지 않았다. 겨우 노력해야 가능한 것을 요구하거나, 노력해도 채워질 만한 것이 아닌 것을 요구했다...



  23살 여름 즈음에 은행에 취업하기 원하는 다른 선배들과 이야기하며 은행이 원하는 스펙을 처음 듣게 되었다. AFPK, CFP, CPA, 유통관리사는 물론이고 공모전에 나가 수상경력도 있어야 조금 유리하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런 스펙들을 갖출 확률이 거의 희박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금융권 어디서나 그 정도의 스펙은 원했고, 심지어 그 기준에 맞춰서 취업하는 이들이 주변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뒤늦게 스펙을 갖추기 시작했지만 후회 없이 다 놀아보지도 못한 20대가 따라갈만한 목표가 아니었다. 문득 나에게만 불가능한 것들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샤*를 쓰다가 i사의 mp3의 사전기능을 사용했었는데 역시 참맛은 오리지날 전자사전이다

  어느 날 그런 초조함에 괜히 낮술 한잔하고 공부가 안될걸 알면서도 도서관으로 향했다. 타인의 눈치는 꽤 보는 타입이었기에 혹시나 냄새로 피해가 갈까 독서실 구석으로 가 앉았다. 공부가 안되더라도 몸이 공부를 기억했고 반사적으로 가방에 있는 물건들을 책상 위에 펼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문득 오랫동안 사용해 온 전자사전을 꺼내다 담백하게 사전의 기능만 있을 뿐 아무런 부가기능이 없는 회색의 전자사전이 내 처지와 닮아 보였다.



  그 전자사전이 나올 때만 하더라도 혁신이었다. 두껍고 무거운 종이로 된 사전이 아닌 가볍게 휴대할 수 있는 전자사전은 공부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유행은 기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MP3 기능이 탑재되어 있는 전자사전이 나오더니 컬러화와 함께 사진도 볼 수 있는 전자사전도 나왔다. '도대체 공부하는데 음악 듣기와 앨범 기능이 왜 필요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람들은 MP3와 앨범 기능을 전자사전의 기본 기능이라고 생각했다.  제조사 간의 경쟁이 심해지더니 카메라 기능이 생기거나, 방수 기능, 타자연습의 기능이 생기기도 했다. 이마저도 조금 지나니 동영상도 볼 수 있는 PMP라는 것이 나왔을 땐 전자사전은 기기로서의 기능도 없어져버렸다. 그리고 지금의 스마트폰이 살아서 움직인다면 다 옛말이라며 웃어버릴 최첨단 세상이 되었다.

  다 커버려 다시 백수가 된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치열하게 공부했던 향수라도 느껴보기 위해서였는데 우연히 당시 내가 썼던 전자사전을 쓰고 있는 학생의 모습이 보였다. 반가움보다는 의아함이 컸다. 왜 저런 구닥다리를 쓰고 있는 거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어떤 강한 열망을 느꼈다. 백수의 삶에 대한 어떤 명쾌한 힌트를 그곳에서 얻을 수 있겠다는 강한 확신을 느꼈다.


"저기 근데 그 사전 되게 오래된 건데 그걸 쓰는 이유가 있어요?"

"(사전 기능 말고) 아무런 기능도 없으니 공부에 도움이 돼서요"



  부가기능이 많은 핸드폰은 오히려 공부하는데 집중을 방해하니 공부할 땐 최소한의 기능만 있는 전자사전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구형 전자사전을 찾아 쓰는 게 유행이라고 까지 말해주었다. 낯선 이의 질문에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답변하는 학생의 모습에 놀랐고, 생각지도 못한 문화에 한 번 더 놀랐다.

  세상에는 동영상 기능이 없는 전자사전도 있고, 건조기능이 없는 세탁기도 있으며, 현상 전까지 확인 불가능한 필름 카메라도 있다. 불편할 법도 하지만 조금만 둘러보면 기능의 본질이 재조명되거나, 누군가는 그 제품을 요긴하게 쓰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부가기능이 없어 볼품없는 전자사전이 담백한 공부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필름 카메라의 성격을 담은 불편한 어플은 기능의 소비에서 감성과 추억의 도구가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능이 없다고 생각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퇴물로 만드는 것이다.


  저 구닥다리 전자사전도 화려한 부가기능은 없지만 충실한 본연의 기능으로 누군가의 쓰임을 받고 있는데.  우리는 왜 남들과 비교해 너무나도 능력이 없는 자신을 비난하면서도 내 능력이 잘 쓰일만한 곳은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는 걸까?





백수의 삶을 공부합니다.


백수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1화 https://brunch.co.kr/@herman-heo-se/50

백수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2화 https://brunch.co.kr/@herman-heo-se/52

백수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3화 https://brunch.co.kr/@herman-heo-se/53

백수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4화 https://brunch.co.kr/@herman-heo-se/55

백수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5화 https://brunch.co.kr/@herman-heo-se/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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