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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술가 정해인 Jul 21. 2020

알바의 추억

저는 알바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만

  어느덧 입사한 지 20년이 흘렀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직장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대학에 다닐 때도 아르바이트를 해 본 적이 없다. 지금껏 오로지 숫자 하나만 붙들고 씨름해 왔더니 막연히 다른 직업이나 다른 일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다른 일들은 어떻게 일 하는지 그 일의 경험은 어떤 느낌인지 무척 궁금했다.

  최근에 무역업을 하시는 분을 만나 그분의 아르바이트 이야기를 들었다. 다양한 경험만큼이나 삶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체득할 수는 없겠지만 그분의 이야기를 잊기 전에 적어 본다.



  처음 시작은 비데 영업이었다.

  비데가 무엇인지도 모를 무렵 그저 영업 안내판을 하나 들고 철물점을 돌았다. 철물점에서는 재료를 쌓아놓고 파니 비데가 팔리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에 무작정 찾아갔다. 대학에 들어가서 맞이한 첫 방학, 영업에 대한 노하우도 없고 제품에 대한 공부도 없는 대학생이 그저 비데 안내장 하나를 들고 돌아다녔으니 비데를 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의 고생 끝에 비데 1대 팔지 못하고 첫 아르바이트는 끝이 났다.


  두 번째로 해 본 아르바이트는 해수욕장에서 수박 팔기.

  사촌 친척이 같이 일 해보자는 말에 잠깐 동안 수박을 팔았다. 2톤 트럭 한 대를 빌려서 수박밭을 통째로 샀다. 밭에 있는 수박을 다 산다는 것도 신기했고 그것을 팔겠다는 친척도 대단해 보였다. 산처럼 높이 쌓은 수박을 트럭에 싣고 바닷가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단속이 나올까 봐 조마조마하며 수박을 열심히 팔았다. 수박 쌓느라 고생, 내리느라 고생, 목청이 터져라 팔았지만 이것저것 다 제하고 나니 생각보다 손에 쥐는 돈은 많지 않았다.


 세 번째는 중국집 배달원이었다.

  호텔 주방장이 차린 중국집이라 그런지 배달원이 5명이 넘었다. 그렇게 많은 배달원이 정신없이 근처로 배달을 했다. 근처에 도박장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팔보채나 비싼 요리를 시켜서 한번 배달을 가면 음식 요금이 10만 원이 넘게 나왔다. 화투판이라 그런지 배달원에게 고생했다며 용돈도 챙겨주었다. 그렇게 중국집 매출은 한 달 매출이 몇천만 원이 넘었다. 그렇게 돈을 긁어모아서 사장님은 금방 부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국집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못했다. 사장님 역시 노름에 빠졌고 어느새 본부인이 아닌 낯선 여자와 팔짱을 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사장님은 번 돈을 모두 날리고 중국집은 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벌어보자며 공사판에 도전을 했다. 방학 동안만 잠깐 할 생각이기에 돈을 많이 주는 아르바이트로 정했다. 하루에 십만 원이 넘는 돈을 주는 일이라기에 지원했다.

  공사장의 기초가 되는 철근을 나르는 아르바이트였다. 두꺼운 기둥에 철근을 세우면 나이 든 아저씨들이 철사를 감아서 기초를 보강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온몸이 부러질 듯 너무 힘이 들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지 어느새 무거운 철근을 날라도 아무렇지 않았다.

  태권도를 배우던 후배와 함께 2인 1조로 철근을 날랐다. 어려운 일을 함께 해서인지 그 친구와는 정이 많이 쌓였다.

  그렇게 제대로 돈을 벌어서 아버지께 처음 용돈이란 걸 드려 보았다. “나중에 더 많이 드릴게요”라고 아버지께 약속하였지만 아버지는 야속하게도 취직을 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용돈으로 드린 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나마 자식으로서 도리를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학기가 다시 시작되었고 공사 아르바이트는 잠시 접어두었다. 공사장 아저씨들은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연락이 왔다. 얼른 일하러 나오라며 채근을 했다.

  장학금이 나올 거 같으면 방학의 절반만 일을 했고 장학금이 나오지 않을 거 같으면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일을 시작했다. 아마도 지금까지 그 일을 계속했다면 이제는 힘이 빠져 철근을 나르는 일이 아닌 그 시절 아저씨들이 그랬듯 철사를 묶는 일을 했을 것이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숱한 실패의 경험과 어려운 성공의 경험 그것들이 쌓여 지금의 무역업을 하는 그분의 능력을 만들어주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곁에서 그 일을 보는 것과 막상 그 일을 하는 것에는 간극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나는 타인의 경험을 동경하는 것이었을까?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옛말은 틀림이 없나 보다. 그분 덕분에 다른 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조금은 내려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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