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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술가 정해인 Oct 24. 2023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아이를 키우면서

  엘리베이터 문 앞에 두 남자아이가 섰습니다. 노란 유치원 옷을 입고 있는 큰 아이 옆에 그보다 더 어린 천방지축 어린아이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 시절 아이들은 유난히 에너지가 강하죠. 유모차를 밀고 있는 엄마는 끊임없이 주의를 줍니다.

  “조용히 해”

  “만지지 말고, 거기 손대면 손 다쳐”

  “문 닫히기 전에 얼른 들어와”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 해”

  “바닥에 앉지 말고 일어나”

  바쁜 엄마의 입과 달리 아이들은 엄마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게 차분히 이야기를 듣는다면 아이가 아니겠지요.

  아이에게 이야기를 하는 엄마를 보며 돌이켜보면 과연 5,6살의 아이가 부모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었나?라는 생각을 이제야 해보게 됩니다. 그 시절에는 당연히 안 되는 사실을 당연히 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나이가 들어서 아이를 키우면 더 잘 키웠을까요?


  문득 큰 아이가 유치원이었을 때를 떠올려 봤습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말을 듣지 않는지 부모를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저러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아이의 키가 저보다 더 커졌지만 잔소리는 여전히 줄지 않습니다. 학교 가기 싫다. 공부하기 싫다. 덩치만 커졌을 뿐 아이에 대한 잔소리는 여전합니다. 다만 예전처럼 공공장소에서 컨트롤이 안될 만큼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겠지요.


  처음 아이가 태어났을 때 생각은 그저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런 바람은 오래가지 않았지요. 어린이집을 가면서 글씨를 조금 더 잘 쓰기를 바라게 되고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산수를 조금 더 잘 계산하기를 바랍니다. 중학교에 가면서 그래도 한랭 전선과 온난 전선 정도는 구분할 줄 알기를 바랍니다. 시험을 보게 되면서 아이들의 성적이 나오니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부모의 욕심이 시작됩니다. 아이를 등수로 바라보게 되며 지금보다 조금 더 잘 맞기를 바라게 되죠.


  분명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는 그저 건강만을 생각했었는데 어느 순간 아이가 그저 건강한 것으로는 부모의 마음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이가 잘 되어야 나중에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고생도 덜 할 거라며 아이에게 이야기하지만 정말 아이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어쩌면 부모의 욕심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부모의 잔소리는 멈추지 않습니다. 과연 지금 내가 아이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정말로 아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한 욕심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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