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힘

세 가지 무기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지난번 70대 어른들과 저녁 식사에서 못다 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대화가 깊었다. 나이 때문이었는지, 술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이 들어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 거 같아?”


순간 젓가락이 멈췄다.
나는 당연히 ‘돈’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 많이 벌어본 사람, 아직도 현금을 쥐고 있어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는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돈은 그냥 옵션이지.”

한 어른이 웃으며 말했다.

“있으면 편하긴 한데, 그게 사람을 무섭게 만들진 않아.”


그날 내가 들은 대답은 의외였고,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첫 번째 무기, 여전히 책을 읽는 사람


가장 먼저 나온 이야기는 독서였다. 나이가 들어도 책을 놓지 않는 사람은 확실히 다르다는 말이었다.

가만히 떠올려보니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같은 연배인데도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있고, 몇 마디 만에 대화가 막히는 사람이 있다. 차이는 크지 않아 보였지만 분명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말이 짧아도 핵심을 찔렀고, 읽지 않는 사람은 늘 과거 이야기로 돌아갔다.


“내가 살아보니 말이야.”

그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많았지만, 이상하게 설득력은 없었다. 경험은 많았지만 생각은 갱신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반대로 독서를 놓지 않은 어른들은 달랐다.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않았고,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다.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방어부터 하지 않았다. 나이 들수록 굳어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유연했다.


독서는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라, 노년에 굳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두뇌 운동이라는 걸 느꼈다.


두 번째 무기, 여전히 몸을 쓰는 사람


두 번째로 나온 답은 운동이었다. 솔직히 말해, 이건 말처럼 쉽지 않다. 나 역시 느낀다. 나이 들수록 몸은 이유 없이 아프고, 이유 없이 귀찮아진다. 오늘 하루쯤은 쉬어도 될 것 같은 날이 점점 늘어난다. 그런데도 운동을 꾸준히 하는 사람들은 분명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임에 잘 빠지지 않았다. “아파서 못 나왔어요”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정말 덜 아팠다. 몸이 버텨주니 약속을 지킬 수 있었고, 약속을 지키니 관계가 유지되었다.


운동하는 어른들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걸음걸이가 달라 보인다. 하지만 진짜 차이는 몸이 아니라 태도였다.

매일 운동복을 입고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매일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70대, 80대에 운동을 한다는 건 건강 관리가 아니라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였다.


세 번째 무기, 기록하는 사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기록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은 빠져나간다. 사람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고,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흐릿해진다. 그런데 기록하는 사람은 달랐다. 그는 기억을 붙잡아두고 있었다.


작은 수첩, 스마트폰 메모, 짧은 일기.

형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남겨두는 습관이었다.


“기억나? 우리 10년 전에 제주도 갔을 때.”

누군가가 이렇게 물으면, 그는 웃으며 수첩을 꺼냈다. 날짜, 장소, 그날 나눈 이야기까지 정확했다.

사람들은 말했다.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해?”


그건 그 사람의 기억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기록의 힘이라는 걸 안다. 기록은 기억을 이긴다.

더 정확하고, 더 오래가고, 무엇보다 삶을 흘려보내지 않게 만든다. 기록하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는 자기 삶의 증인이 된다.


아직 70이 되려면 20년쯤은 더 남았다. 하지만 막상 그때 가서 시작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노년의 힘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부터, 독서와 운동과 기록이라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꾸준히 하지는 않는 아주 사소한 선택들이 쌓여 만들어진다.


나는 돈 많은 노인보다는 생각이 예리하고, 몸이 버텨주고, 자기 삶을 기억하는 노인이 되고 싶다. 누구에게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그런 사람.

그런 노인이라면, 충분히 남들에게 존경받는 어른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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