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세계를 마주했을 때

by 은목

-VOSTOK 매거진 38호를 읽고 쓴 글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다 보면 그 사람은 어느새 나의 세계가 된다. 나에게 그 대상은 같은 반 남자애일 때도 있었고, 매일 같이 노는 친구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인물은 대부분 케이팝 아이돌이었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여러 아이돌을 사랑해왔다. 그들이 현재의 나를 구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돌을 사랑하는 동안에는 나의 좁고 오래된 방이 단숨에 꿈의 공간으로 바뀐다. 수평이 조금 틀어진 채로 붙여진 포스터,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으로 설정해 놓은 컴퓨터 배경화면, 크고 작은 굿즈들. 아이돌은 내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환상이다. 지금 당장 내 눈 앞엔 없지만 어딘가엔 존재하는 세계. 고요하고 높은 나의 이데아.


요즘에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사랑하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한다. 위버스에 들어가서 그가 남긴 글을 읽고, 인스타그램에 종종 올라오는 근황을 보며 그의 행적을 가늠해본다. 어렸을 때는 서울과 아주 먼 지방에 살았지만, 서울에 올라온 지금은 좋아하는 아이돌과 삶의 행적이 종종 겹친다. 그는 내가 내리는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사진을 찍고 내가 놀러 가는 곳에서 음식을 먹는다. 그가 나의 동네에 놀러 와서 찍은 사진에 나는 '좋아요'를 누른다. 비슷한 공간에 있지만 닿을 수 없는, 애틋하고 애타는 거리감을 나는 사랑한다.


어쩌자고 나는 아직까지 아이돌을 사랑하는 것일까. 덕질도 결국엔 실재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애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 사람을 좋아하려고 마음 먹어서 좋아하는 게 아니다. 어느 순간 '러브 다이브' 하게 된다. 그렇게 나는 케이팝 세계관에 갇힌 채 유영하고 있다.


아이돌 팬덤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대표적으로 아이돌과 연애하듯 좋아하는 일명 '유사 연애', 마음으로 낳은 딸과 아들을 키우는 것 같은 '유사 육아'가 있다. 하지만 나는 아이돌 덕질이 연애와 육아를 초월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 '유사 육아'나 '유사 연애'라는 단어를 만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만 나를 24시간 '앓이'하지는 않는다. 나의 전 남자친구도 나를 사랑했겠지만 나의 모든 것을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팬들은 아이돌이 무대에서 1초 정도 짓는 미소에 영원을 투신한다. 무모하고 값진 사랑의 형태.


케이팝이 나의 세계를 만들었기에 나의 첫 직업은 인터넷 매체에서 연예 기사를 쓰는 사람이 됐다. (명함에는 기자라고 적혀있지만, 나는 아직도 그 직함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아이돌이 밥 먹여 주진 않지만 밥벌이를 하게 해줬다. 안타깝게도 현재 직장은 현장 취재를 나가지 않기에 케이팝의 전선을 직접 지켜볼 순 없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들의 소식을 전할 땐 조금 더 공을 들이게 된다. 처음 입사했을 땐 포털 사이트에 내 이름과 최애 이름을 나란히 검색하면 내가 쓴 기사가 뜬다는 게 신기하고 이상했다.


현실과 이상의 중간 지점에서 나의 작은 세계를 꾸려가는 것, 그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있는 나의 사랑을 오래 유지하고 싶다는 부푼 꿈을 안고, 오늘도 나는 그에게 마음을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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