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텃밭일기 01화

텃밭일기 #1 20190518

by 전영웅

한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메마른 텃밭에 아침마다 물을 주어야만 했다. 호스 끝에 매달린 분사기는 연결부에 물이 샜다. 마당의 호스를 끌어 텃밭 앞에 서서 물을 뿌리면, 새는 물이 호스를 타고 흐르며 장갑을 적시고, 마른 땅에 뚝뚝 떨어지면서 바지에 흙탕물을 튀겼다. 아침이라 해는 아직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텃밭에 물을 뿌리는 방향은 해를 바라보는 방향이다. 마르고 건조한 공기에 햇살은 느닷없이 따가워져 챙이 넓은 모자가 필요했다. 귀찮아서 모자를 쓰지 않으면 눈을 깊이 찌푸리게 되고, 얼굴은 금방 벌겋게 탔다.


물을 뿌리면 작은 물방울들이 공기를 타고 산개한다. 가끔은 무지개 한 조각도 보인다. 물줄기를 멀리 보내느라 팔을 올리고 각도를 더 높이면, 어디선가 참새나 직박구리들이 날아와 물줄기가 닿는 살구나무 가지나 무화과 가지에 앉았다. 내가 뿌리는 물줄기를 맞으며 깃털을 세우고 목욕을 했다. 그게 귀엽기도 하지만 살짝 얄미워서 물줄기 방향을 조금 틀면 물줄기를 따라 다른 가지로 옮겨 앉았다. 참새녀석들의 목욕은 잠깐이지만, 직박구리들은 아예 물줄기 아래에서 눌러 앉을 기세였다. 그게 또 얄미워서 수압을 높여 직분사로 쏘아볼까 했지만, 수압을 그 정도로 높일 수 없었다.


물을 넉넉히 준다고 주지만, 사람이 주는 물은 언제나 부족하다. 조금씩이라도 날마다 성실하게 뿌려주는게 인간의 최선이다. 건조하고 메마른 늦봄의 걱정을 조금 덜 수 있는 건, 올해 텃밭에는 거두어 놓은 잡초들을 말려 이랑을 덮는 덤불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겨우내 텃밭에서 자란 잡초들을, 모종을 심고 파종을 하는 동시에 거두어서 마당 한 켠에 쌓아두었다. 마르고 건조한 봄날이 좋았던 한 가지는 쌓아둔 잡초덤불이 잘 말랐다는 점이다. 그것들을 모종과 씨앗을 심은 이랑에 올려 덮었다. 땅 속 수분이 조금이라도 더 유지되니 이제 막 뿌리내리고 있을 작물들이 메마른 나날을 좀 더 수월하게 버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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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있는 무언가를 키우는 일은 한 곳에 머무르는 삶을 강요한다. 수시로 텃밭을 살펴야만 하는 입장에서 오랜 시간 집을 비운다는 건, 마음이 무척 불편해지는 일이다. 게다가, 마당에는 반려견 한 마리가 살고 있다. 녀석들을 집에 두고 어딘가로 떠나는 것은 분명한 대책없이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진료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며칠간 휴가를 떠난다는 공지는 한 달 전부터 붙어 있었다. 많지는 않지만, 내가 휴가를 떠난다는 소식에 나를 찾는 환자들은 대책을 세워주기를 요구하거나, 스스로 대책을 세웠다. 휴가 전에 와서 정기적으로 처방받는 약을 처방받아 갔다. 주기적으로 맞는 주사가 있으면 일정을 조정해서 휴가 직전 찾아와 주사를 맞고 돌아갔다. 만일 내가 휴가 공지를 늦게 했거나 아무런 공지없이 떠났다면, 환자들에 대한 나의 신뢰나 믿음은 급격하게 떨어졌을 것이다.


말 못하는 녀석들에게도 사람을 믿을 수 있게 해 줘야 했다. 반려견 녀석에게는 대용량 급식기와 급수기를 집 안에 넣어 주었다. 친하게 지내는 동네 지인에게 오가면서 한 번씩 좀 보아 달라 부탁했다. 텃밭에는 떠나기 직전에 넉넉하게 물을 뿌려 주었고, 키를 키우기 시작하는 토마토 줄기를 지주대에 묶어 주었다. 이랑의 덤불은 넉넉한지 살피고 이후의 날씨를 살폈다. 5일간 집을 비우는데 중간에 비소식이 있었다. 다행이었다. 텃밭 대책은 사람의 능력만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힘을 빌리는 일이기도 하다. 텃밭 작물들이야 사람이 주는 물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더 좋아하니 더더욱 좋은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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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일기를 교토에서 시작한다. 집을 떠나 온지 4일 째다. 반려견 녀석은 복도 많아서 지인들이 번갈아가며 집에 와서 밥과 물을 잘 먹고 있나 살피기도 하고, 데리고 나가 산책도 시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보내주었다. 교토는 흐리고 간간히 부슬비가 날리는 날씨인데, 제주에는 호우경보가 내릴 만큼의 많은 비가 내리고 바람도 거세게 불고 있다고 한다. 비가 많이 내렸다니 작물들이 마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거센 바람에 고추나 가지의 가는 줄기들이 꺾이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바람이 너무 심하면 이랑을 덮은 덤불이 들려서 작물들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줄기를 올리는 콩줄기는 탄탄하고 억센데, 바람에 이런저런 이유로 부러지지는 않을까도 걱정이다. 멀리서 직접 보거나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이다. 무언가를 한 곳에서 돌보고 살펴야 하는 입장에선, 여행은 마음의 사치이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점점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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